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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Aug 17. 2020

오래된 미래








크게 다르진 않았다. 쇼핑몰을 따라 길게 드리워진 차양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신도시 산책로 옆 콘크리트 수로 안에 방류된 물고기 떼처럼 느린 물살을 따라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리 바쁠 것 없이, 언뜻 눈에 띄는 장소가 있다면 들렀다 가도 된다는 여유로운 미소들이 그래 보였다. 우리 일행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까무잡잡한 피부색이었는데, 그것이 미소 밖으로 드러난 치아를 돋보이게 해서 우리보다 일점오 배 더 행복해 보였다. 차양 밖으로 비스듬히 세워진 몇 대의 까만 벤츠의 엠블럼은 햇살에 난반사하여 그들의 빛나는 치아보다 일점오 배 더 빛나고 있었다. 타국에 도착한 지 사흘도 안 돼 기어이 찾아 들어간 한식당에서도 그들은 일행보다 부티가 흘렀다. 한식당에서는 익숙지 않은 흰 천을 드리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잡채를 집었고 해물파전을 앞니로만 잘라먹었으며 육개장 국물은 입가의 미소와 함께 머금었다. 테이블 위에 시뻘건 국물의 궤적을 남기고 공깃밥 추가요를 목청껏 외치고 급기야 신트림을 뿜는, 주림에 맞서 싸우듯 끼니를 챙기는 우리의 모습과는 일점오 배가 아니라 열 배는 우아해 보였다. 

부잡니다. 이 사람들은요. 

현지에서 십 년 넘게 살고 있는 초청자가 내 눈길을 따라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식당의 음식값은 웬만한 호텔 뷔페 가격에 가까웠다. 한식당임에도 나는 일행의 쩝쩝대는 소리가 그들의 눈총이라도 받을까 싶어 대접에 밥을 말아선 코를 박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던 순간 시선 안으로 이물처럼 툭툭 걸리는 게 있었다. 품에 있는 갓난아기 때문에 테이블에 바로 앉지 못하고 비스듬히 몸을 틀어 앉아 있는 어린 소녀들. 부자들 집에 얹혀사는 식모라 했다. 소녀들은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그들 사이에 잠든 아기가 깰세라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그 시절엔 이 나라가 그리 잘 살았잖소. 

일행 중 누구보다 그 시절의 허기를 기억하고 있으며, 한식당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제대로 즐기고 있던 아버지가 종업원에게 요지까지 부탁하며 알은체를 했다. 정치의 부패가 빈부차를 낳았고, 그래서 식모로 살고 있는 소녀들에게 학교에 다닐 수 있게 장학금을 전달하러 온 우리 일행은 그들 사이에선 제법 ‘사는 사람’들이었다. 

볼펜 몇 백 자루와 노트를 한 가득 싸들고 이 나라의 영공을 통과했을 때 그들의 땅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나는, 공항 유리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열대 몬순기후를 알지 못했다. 마을 공터에서 불어 터진 스파게티를 떠줄 때 몰려든 아이들이, 스팸 한 조각에 춤을 추던 소년소녀들이 끈적이다 못해 후끈거려,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기까지 하였다. 

왜 십 년이나 지난 그곳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걸까? 

실력으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운빨로 정규직이 된 비정규직을 규탄하는 청년의 육성을 들어서일까? 금리가 낮아 여윳돈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이득이라고 말한 노인을 만난 탓일까? 아이들 키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마사지 의자 광고를 본 탓일까?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그 마사지 의자를 만든 이의 말 탓일까? 정시가 옳은지 수시가 옳은지 토론하는 이들을 본 탓일까?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일을 하러 갔다가 내가 그냥 업체 사람인 줄 알고 슬리퍼 신은 발로 이리저리 오디오 작동 버튼을 가리킨 어느 선생을 만난 탓일까? 외려 일면식 있는 내 아이 담임이라도 나타나 그 선생이 무안해지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게 떠올라서일까? 부엌에서 눈물짓던 아내의 뒷모습이 떠올라서일까? 잠시 갠 하늘이 반가워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려 할 때 부지불식간 내리 꽂힌 빗줄기 때문일까? 거칠게 땅을 때리고 출입문까지 빗물을 튀기던 국지성 호우가 그곳의 열대 몬순기후를 닮아서일까? 여름밤, 잠든 두 딸의 끈적이다 못해 후끈거리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내 아이들이 하얀 테이블 앞에 비스듬히 앉아 있으면 어쩌나… 그러면 어쩌나… 정말 그러면 어쩌나 싶어서 나는 침대 머리맡에 내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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