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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gmong Oct 06. 2022

'작은 사람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

학부모 상담 기간이 한 달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신청서가 아이의 책가방 구석에서 꾸깃꾸깃 한 채로 발견되기 전까지 코로나19로 학부모 상담은 취소된 줄 믿었다. 

부랴부랴 둘째 아이 담임에게 카톡을 드렸다. 

상담 신청을 놓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간단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서면으로 받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고맙게도 둘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전화를 주시겠다고 했다.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나눴다. 감사하게도 담임 선생님은 둘째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주셨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피드백은 부정적인 문제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00이가 수업 시간 중에 제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 걱정이에요. 수학 시간에 세로식을 설명해줬는데 잘 듣지 않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문제를 계속 틀렸어요 어머니."


"자신의 생각과 의사표현을 또래에 비해서 비교적 잘 말하는 편이긴 한데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친구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봐요. 듣는 습관은 추후 학습과도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습관을 좀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


"자세가 좋지 않아서 제가 자주 지적을 하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네요. 특히 점심 시간 때 바른 자세로 밥을 먹지 않아 자주 혼내게 되네요."


"00이는 또래 남자애들보다 언어력과 수리력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얼마 전에 수업 시간 때 어른들이 쓰는 단어를 써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혹시 집에서 그런 말을 자주 쓰나요?"


"00이가 뭐 하나에 몰두해 있는 걸 자주 보는데요. 그 또래 애들이 많이들 그렇긴 한데...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니"


.....


그외에도 참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을 많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이가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과 학교나 그외 조직에서 보이는 모습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양육에 참고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여덟살 꼬마 아이를 보는 선생님의 시선이 '문제점'을 찾아내어 고치는데만 맞춰져 있다는데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물론 직접 말씀 드리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 약 7년 정도 산 '작은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이 궁금할 것이다. 세상의 룰에 자신을 왜 맞춰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에서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완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부모들이나 선생님 등 대다수의 어른들은 '작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미숙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문제점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교정하고 고치려 든다. 그게 어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따끔하게 혼내는 게 맞다. 그러나 '문제점을 찾아내는 시선'은 '작은 사람들'에게 가져야 할 어른들의 디폴트값이 아니다. 

어른들이 '작은 사람들'을 바라봐야 하는 기본값은 '이 아이가 가진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 아이는 어떠한 강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긍정적인 시선이다. 

그러한 시선으로 아이를 관찰하면 온갖 문제점을 덕지덕지 가진 아이가 아니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수많은 가능성과 장점을 가진 한 사람의 완벽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땅에 사는 '작은 사람들'은 미숙한 존재들이 아닌, 그저 지구라는 낯선 별에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모든 게 서툰 존재들일 뿐이다. 서툴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익숙해지게 된다. 어른들은 그저 '작은 사람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곁에서 살짝씩 넛지해주며 응원하고 격려해주면 된다. 

완벽한 존재로 태어난 작은 사람들은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봐서는 안된다. 정작 그렇게 바라보는 어른들은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수한 존재들인가!?

어른들은 그저 어쩌다보니 '작은 사람들'보다 지구별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일 뿐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낫다고 볼 수 있을까?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 나중 정착한 사람들을 보며 "당신은 정착하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리는군요. 정말 문제에요. 왜 나만큼 따라오지 못하는거죠? 왜 이렇게 서툴러요? 왜 이렇게 어리버리한 거죠? 좀 더 똑똑해져봐요."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아이들을 가만히 관찰하다보면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단어를 말하고, 표정도 더욱 풍부해진다. 어른들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것들을 레고블럭으로 뚝딱 만들어내는가 하면 축구공 하나면 낯선 친구들과 금새 절친이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오히려 계속 문제를 내달라고 조를 정도로 좋아한다.

눈물 쏙 빼며 혼이 나더라도 다음날이면 엄마 볼에 다정한 뽀뽀를 건낼 정도로 사랑이 많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길을 걸을 때 먼저 손을 잡는 것도, 엄마의 허그뽀뽀 하나에 하루종일 천진난만한 까불이가 되는 것도 아이들이다. 


나를 비롯한 부모들, 어른들, 특히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아이가 가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꺼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점은 쉽게 드러나지만 가능성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관심과 애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아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 무엇인지 찾아보겠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가끔 여덟살 아이에게 말한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물론 처음에는 서툴거야. 실패도 하겠지. 하지만 결국 너는 해내게 되어 있단다."


우리 집에 있는 실수투성이에 장난꾸러기 까불이 여덟살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길을 찾아나갈 것이다.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나는 아이가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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