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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어머니 이야기 1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내 친구 시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얘는 아직도 시어머니가 가끔 보고 싶다고 한다.

도대체 시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것은 무슨 마음인지, 어떤 관계를 맺고 지냈어야 돌아가신 후에도 시어머니가 보고 싶은것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절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지난 주에 썼던 브런치 글 '가족 묘지를 거부했습니다'를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시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미 좋아질 수 있는 선은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이번 어버이날 가족 모임에 며느리 중에서 나만 빠졌다. 며느리가 셋이고 내가 큰 며느리다.

두 달 전에 예약해두었던 건강검진이 가족 모임 날짜와 겹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 혼자 기차를 타고 다녀 왔는데 내가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반응은 달랐다.

시아버지: "다 왔는데 너만 안 왔어?" (너도 왔어야지, 서운하다는 말씀으로 해석이 됨)

나: "네, 건강검진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시아버지: "그랬다며.... 알았다" (어쩔수 없지 뭐)

시아버지는 내가 오지 않아서 섭섭했다는 표현을 어떻게든 해 주셨고 무뚝뚝하고 당신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는 분이긴 하지만 결론은 '니가 오지 않아서 내가 섭섭했다'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전화 통화는 내용이 확 달라진다.

시어머니: "애비가 차도 안 갖고 오느라 힘들었다" 

나: "기차타고 가는 게 훨씬 편해요. 어머니"

차가 안 막혀도 세시간은 운전해서 가야 되는 시댁까지 기차가 훨씬 편한 데도, 시어머니는 남편이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부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셨고 (무슨 믿음인지 몰라도 시어머니는 자가용 운전이 더 편하다고 믿고 계신듯하다) 몇 마디 오고 가지 않는 전화통화에서 목소리는 살얼음 낀 동치미처럼 쨍했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했던 가장 큰 거짓말은 상견례때 말씀하셨던 바로 이 말이다. 

"딸도 하나 밖에 없어서 딸처럼 생각할게유"

우리집은 딸이 넷이고 아들이 하나밖에 없지만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귀남이 후남이 같은 차별은 1도 없었고 우리집은 작은 집이라서 명절에 일손 도와야 되는 부담감도 없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가 시집 살이를 겪는 것도 본 게 없어서 결혼에 대한 예비 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결혼하고 나서 겪게 되는 시어머니와 갈등들은 나에게는 매 번 새로운 미니 시리즈처럼 쌓여가기만 했고 어떻게 푸는 줄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 시어머니와 갈등이 있을 때 마다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고 남편도 어떻게 해야 되는 줄 몰라 갈등하면서 남편 나이 서른 하나, 내 나이 스물 일곱에 결혼한 우리는 결혼하고 2년동안은 박터지게 싸우면서 이혼까지 생각했던 시간을 보냈다.


그 중심에 어머니, 당신이 있어서였다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을 못하실것이다.

그저 자식들이 잘 되라고 그 마음 하나로 살아오셨을텐데 당신때문에 며느리가 못 살겠다고, 이 결혼 끝장내고 우리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하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1994년부터 1996년 까지 남들이 말하는 깨가 쏟아지는 신혼 시절에 내가 이혼하고 싶었던 1순위의 이유는 시어머니였다.

-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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