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우리가 헤어진 이유

by 안느의 일기

(이전 : 1편 - 다시 가슴을 뛰게 한 그녀와의 첫 만남)



우리는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한쪽의 요청이 아니라 서로가 거의 동시에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호의와 배려에 날이 갈수록 마음은 충만해졌다.


두번째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조금 더 좋아졌다. 세번째 약속을 잡았을 때 그 마음은 점점 더 명확한 형태를 띄고 확고해질 것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한 호감이 결국은 꽃피지 못하고 꽃봉오리가 똑 하고 떨어져 버린 것에 대해 나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참을 수가 없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말하지 않은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만 없었어도 우리는 제법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처음에는 별 의미 없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내 전부를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을 하나도 모르고 당장 호감이 생길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데 괜히 내 속사정을 먼저 오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정말 만에 하나 그 사람과 호감이 생기고, 정이 깊어지게 된다면 그땐 문제가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그때를 놓치지 말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정이 깊어져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뒤늦게 이를 말하면 그 사람의 상처가 훨씬 깊을테니까.


하지만 실은 이마저도 안일한 생각이었음을, 스스로를 묶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자충수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세번째 만남에서 함께 탄천변을 걸으며 꿈길처럼 아름답게 물든 가을 경관을 만끽했다. 절정에 접어든 단풍들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검붉게 하늘과 땅바닥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정경을 마주한 적이 있었나 아득해질만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해가 질 무렵 손만두전골집으로 넘어가 천천히 식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카페에서 나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내가, 십년 전에, 결혼을, 했었다고.


한 삼분, 혹은 오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디테일한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이혼을 했던 이유를 간략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훌쩍 현재로 넘어와 왜 지금에서야 이 말을 하게 되었는지 변명 같은 설명을 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그녀는 아마도 나를 가만히 지켜보거나 우리가 함께 앉은 2인용 쇼파의 정면에 펼쳐져있던 어둑한 창밖의 노란 은행잎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눈을 거의 마주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 중 가장 위태로운 순간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문장이 터져나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훨씬 더 충격을 받거나 할 말을 잃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의 내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입을 떠억 벌리고 크게 열린 동공의 눈동자만 껌뻑였던 것 같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렇다. 이 이야기를 내 친한 지인에게 전했을 때에도 그랬고, 앞으로 몇년이 지나도 이 순간을 기억하며 그녀의 반응을 떠올릴 때면 나는 반드시 먹먹해질 것임을 확신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종류의 것을 예상할 수 있느냐고, 나는 어떤 대답을 듣는다해도 도저히 믿지 못할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덤덤히 이야기했다. 처음 만나기로 하고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제발 멀쩡한 사람이 나오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서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정말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나와서 많이 놀랐다고 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두번째 만남을 약속했을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어떤 기시감 같은. 그리고 그 느낌은 두번째 만남에서 또 한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을 때 더 강해졌다고 한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내가 어떤 중요한 사실, 자신에게 말해야 하는 어떤 사실을 아직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세번째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는 성경말씀 묵상을 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들어야할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듣게 되었다고. 힘든 이야기 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엉엉 울고 싶었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꺼억꺼억 바닥을 치며 엎드려 울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한다. 그때 무엇이 나를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는지.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며 동시에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채 어버버하고 있을 때 언뜻 보았던 것도 같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의 두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같았다. 세번 밖에 만나지 않아 아직 구석구석 채 살피지도 못한 그 얼굴에 눈물이 고였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확히 살필 수도 없었던 것 같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조금 황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후에도 마치 방금 내가 한 이야기가 약간 황당하지만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은 이야기였던 것처럼 그녀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조금 더 유도했다. 그 배려 가운데 나는 정말로 별 일이 없었던 것처럼 카페 마감 전까지 약간의 이야기를 더 하고 함께 나와 그녀의 집 앞에 그녀를 내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차가 많아 늦은 시간임에도 꾸물거리는 강변북로를 타고 시커먼 도로를 달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의 마음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다고. 이런 반응은 도무지 예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 그동안 드려온 나의 기도와 그녀의 기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런 특별한 상황으로 응답하셨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응답 자체로 감사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었고, 나의 문제에 나의 간절함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으며, 실제적으로 이 상황에 역사하셨음이 큰 위로가 됐다. 무엇보다 따뜻한 그녀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내게 부드럽게 은혜를 허락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3개월 전 삶이 너무 힘들어 떠난 캐나다 여행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섬세한 인도하심으로 나의 영과 육과 혼을 회복시킨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내게 나타나셨음을 나는 의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나는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그녀에게 연락했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꼭 연락을 달라고. 그녀는 집중적으로 기도해본 후에 연락을 하겠노라, 바로 답장을 주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는 충만함과 그녀가 곧 답을 주리란 희망에, 그 답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잠에서 깼을 때도 그녀의 답을 떠올렸고, 하루 종일 그렇게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다. 핸드폰이 흔들리기만 해도 모든 감각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화창한 가을 하늘을 보며,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지인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그녀 생각이 수시로 떠올라 내 마음 속에 계속 차올랐다. 보고싶다, 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라 한 두번은 입밖으로 나직히 내뱉어보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다음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지금은 차분히 기다려야 할 때였다. 그녀는 외할아버지께 받은 교훈 중 하나가 절대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고 대화 중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나는 조바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 이주일, 한달이 되어도 필요하다면 기쁘게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이 지난 이른 밤, 드디어 메시지가 왔다.


(2편 우리가 헤어진 이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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