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주말에 예전 직장 동료였던 손윗 남성과 둘이 만나 파스타를 먹는다고 직전에 알려줘서 심기가 불편한 나 스스로를 분석하며 정리해보는 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 생각해보았다. 질투, 라는 감정이 확실할텐데 왜 질투의 감정이 드는지 좀 더 근본적으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이 불편함이 덜해질테니까, 가능하다면 해방까지도 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이런 감정은 질투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좀 더 거대한 어떤 가치관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생각해보다가, 이를 '어떻게 하면 덜 불편해질 수 있을까', 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으로 생각을 치환해보았다. 그 생각의 갈래들을 정리해본다.
첫째 방법. 가장 일차원적으로는 나도 다른 여성과 일대일로 밥 먹었던 경험이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즉,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나는 이번 연애를 시작하고서는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향후를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인들 중 내 여자친구가 남자들과 친한 것만큼이나 나도 여자들과 친한 부분이 있어서 SNS에서 댓글도 달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다른 이성과 만나 밥을 먹을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듯 여자친구도 그러리라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나 자신의 불편함을 경감시키는데 꽤 효과가 있다. 다만 조금 걸리는 부분은 성에 대한 차이 때문인데,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하는 방식과 여성이 남성에게 어필하는 방식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의견이 반영된다. 그 차이란, 남성이 여성에게 더 강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물리력, 폭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실 언급 자체가 조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문명화되어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합리적으로 협의하지 못하고 그것이 직접적이든, 교묘하게 간접적이든 한쪽이 다른 쪽보다 권력의 우위를 점함으로써 한쪽으로 기우는 형태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는 남자가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게, 여자가 남자에게 지분거리는 것보다 더 더럽고 피해가 크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도 한다. 만약 이런 내 생각을 근거로 내가 다른 여성을 만나는 건 괜찮고 너가 다른 남성을 만나는 건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엉터리가 될 거라고. 남성성의 폭력성이 아무리 객관적 사실이더라도 그렇다. 이 생각이 성립하는 근거는, 결국 만나고자 하는 결정의 주체는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을 넘어선 인간 존재 자체가 가지는 기본권이라는 사실이다. 위험성이 있다해도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 위험성을 전제로 결정권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된다.
둘째 방법. 그동안 여자친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해본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진심이었는지,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헌신했는지, 얼마나 정성 담은 언어들로 서로를 찬양했는지를 증명하는 꺼리들이 차고 넘치게 존재한다. 그 감동적인 문구들과 함께 찍었던 추억의 사진들을 열어보면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며 지금의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방법은 생각보다 큰 효용성이 없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내 마음에 불안이 가득하다보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가지고 내 상황이 여유로울 때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꽤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셋째 방법. 내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상태의 근원을 거슬러 생각해본다. 즉, 언제부터, 무엇에 의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시절 만화책을 중심으로 한 여러 컨텐츠에 노출되었던 것 같다. 그 컨텐츠들은 다양한 장르를 포함했었는데 멜로, 코미디, 판타지 등도 있었지만 범죄, 스릴러, 성인물 같은 종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 완연한 성인의 나이가 되어 돌이켜 깨닫기로, 그런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각종 폭력들에 노출되며 영혼이 더렵혀졌던 것 같다. 이 어둠 너머에 끔찍한 범죄현장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이다.
만약 그 당시 내가 그런 폭력적인 컨텐츠들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다면, 혹은 가이드를 해줄 수 있는 선생님으로부터 이 컨텐츠의 위험성에 대해, 현실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내가 어디까지 이것을 수용하고 어디까지 막아내야 할지 가이드 받을 수 있었다면 그 때의 폭력성이 내 안에 고스란히 자국을 남기진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 남자들의 평균보다 한참은 더 감성적인 나에게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영화로 치자면 이 세상은 <어바웃 타임>처럼 아련하고 예쁘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형사같이 악독하고, 홍상수 영화처럼 욕망 일변도로 천박하며,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잔인한 영화만 만드는 미투로 사라진 감독의 영화들처럼 처절하고 착취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 행동에 대한 결과론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내가 그 십 몇년의 세월동안 그런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컨텐츠들을 보지 않도록 내 눈을 감고 손가락을 돌렸다면 충분히 끊어낼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내 자신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거라고.
다행인 것은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자극적인 것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보고 싶지도 않아졌고 아예 가까이 하지도 않게 됐다. 그것들이 나를 망치고 더럽힌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십수년을 노출되어 왔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비워내거나, 거룩한 것으로 채워내면 언젠가는 이 끔찍한 세계관도 어느 정도는 희석되어 나를 덜 힘들게 하리라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됐다.
넷째 방법. 아직도 하나님께 이 모두를 올려드리지 못한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꽤 잘 핸들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 사랑과 우리의 관계를 내 손에 쥐고 있다고 여기진 않았나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되고 이런 상태에 오래 머무를 순 없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이 전부를, 내 여자친구라고 불렀던 이 사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또 나의 지난 과거들로 인해 얼룩진 영혼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복을 간구하며, 더 나아가 내 삶도 내 생각도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방법은 비단 오늘의 이 문제에만 적용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재정문제, 건강문제, 직업문제 등 내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의 문제들에 일반적으로 통용될만한 보편적인 방법이긴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방법은 총체적이고 동시에 조금 소원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 두어 시간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 적어본다. 늘 그렇듯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고자 끄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러면서 생각은 과거로까지 연결된다. 예전에도 그랬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6년, 7년 즈음 전 만나던 사람은 회사에서 새벽까지 야근하는 게 밥 먹듯 흔한 직종의 사람이었다. 회식도 잦았고, 술도 많이 마실 일이 있는 회사였다. 하루는 그녀가 자정 넘어까지 늦게 일하고, 회식까지 한 후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내게 일을 마쳤다고 의무적으로 전화를 했는데, 나와 통화를 하다가 술에 너무 취해 그만 전화기를 놓치고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그날 경험했다. 늦은 밤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 그녀를 깨우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해야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 무작정 집을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회사, 어딘지 알 수 없는 회식장소, 그녀의 집 어디로 가야하나 어쩔 줄 모른 채 그저 엑셀을 풀로 밟았다. 신촌로터리에서 한개 전 횡단보도에서 나는 과속한 채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 사고를 낼뻔했고 귀를 찌르는 타이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도로에 멈춰서고 말았다. 너무 화가 났고 너무 불안했고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운전대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비록 결국 그녀는 택시 기사의 깨움으로 몇십분 집에 도착해 내게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그 연락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없었다. 그 경험은 내게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반복되는 패턴들이 있다. 내가 사랑에 진심인 것, 사랑에 유독 많은 기대를 하는 것, 이런 모습이 잘 변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온 것들, 이런 것들 말이다. 물론 내 연인이 남성들과 공존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에 대한 불안과 질투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그런 면모들을 긍정하려고 한다. 반복되는 패턴들이 있는만큼, 전과 달리 더 능숙하게 대처하고, 조금 다르게 반응하고, 결과적으로는 조금 다른 패턴을 이끌어내는 것까지 이제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건 내가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인생과 성품을 하나님을 닮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게 빚어가심을 믿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내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수 있게 내어드리는 나의 결단과 순종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이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이 중 10%라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아무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이와 같다. 그리고 나를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