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셀마SELMA>의 주제곡인 '글로리(GLORY)'의 가사 일부다. <셀마>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골든글로브 주제가상을 비롯해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52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에서 ‘올해의 영화 톱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65년 3월 7일 역사적인 셀마 행진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시위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흑인 시위대는 주지사를 만나 흑인에 대한 참정권 차별 철폐를 요구하기 위해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주도(州都)인 몽고메리까지 86km 거리의 평화 행진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은 셀마 시(市) 경계에서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면서부상자가 속출했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틀 후인 3월 9일에 시위대는 2차 행진을 시도했지만, 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폭력으로 인권운동가 제임스 리브가 사망했다. 이 같은 유혈사태로시위는 전국으로번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연방군 2000명을 파견해 3월 21일 3차 행진을 호위했다. 2만 5000여 명의 시위대는 마침내 나흘 만에 몽고메리에 도착하게 된다.
셀마 행진은 같은 해 8월 2일 린든 존슨 대통령이 제출한 <투표권리법>이 의회를 통과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주 정부 차원의 투표권 차별을 금지한 이 법이 통과됨으로써 흑인들은 투표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 '글로리'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곡으로, 존 레전드의 소울 풀한 보컬과 연설하는 듯한 강력한 래핑이 잘 어우러져 행진 당시의 감동을 묵직하게 전달하고 있다.
미국에서 투표권 확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당시에는 전체 인구의 6%만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13개 주 대부분에서 21세 이상이면서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매사추세츠에서는 매년 3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하는 자유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60파운드 가치의 부동산을 소유한 백인 남자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이 정치적 권리를 온전히 확보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기나긴 투쟁이 필요했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남북전쟁(1861~65년)까지 치른 뒤 3개의 수정헌법을 통해 법적으로는 인종 차별을 철폐했다. 우선, 1865년의 수정헌법 제13조로 노예제를 폐지했다. 1868년에는 수정헌법 제14조에서 미국에서 출생하거나 귀화자, 해외에서 미국인의 친생자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다. 1869년의 수정헌법 제15조에선 ‘인종·피부색, 이전의 예속 상태를 이유로 투표권 부여를 금지할 수 없다’고 명시함으로써 흑인에게까지 투표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미국 남부의 여러 주는 수정헌법 적용을 교묘하게 피하고 흑백분리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계속했다. 노예해방에 반대했던 남부 주들은 '문맹(文盲) 검사'같은 방법으로 흑인들의 투표 참여를 제한한 것이다.
급기야, 참정권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셀마 행진이 벌어졌고, 1965년 <민권법>, <투표법>이 제정되고 나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흑인에게 투표권이 보장됐다.
여성의 정치 참여는 흑인보다 오히려 더 늦었다. 1869년 흑인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수정헌법 제15조가 제정되자 여성들도 투표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여권운동의 나폴레옹이라고도 불리는 수전 앤서니(1820~1906년)는 1872년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100달러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 헌법은 여성의 투표권 허용 여부를 개별 주의 결정에 따르도록 했다. 여성들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일부 주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할지 여부를 묻는 투표가 있었으나 모두 부결되다가, 1920년 8월 18일 수정헌법 19조가 의회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다.
"미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을 이유로 미합중국(연방) 또는 어떤 주에 의해서도 부정되거나 제한되지 않는다."(수정헌법 제19조)
여성에게 참정권이 보장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인 2020년에는 흑인 여성 부통령이 탄생했다.
▲ 2020년 대통령 선거일은 11월 첫 번째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인 11월 3일이다.
대통령 선거일 or 선거인단 선거일
미국의 대통령 선거일은 언제일까? 11월 첫 번째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일은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 아니라,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모든 유권자가 이 날 전국적으로 직접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는데 통상 이날을 대통령 선거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일을 11월 첫 번째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로 정한 이유는 뭘까? 이유를 들여다보면, 다소 엉성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1840년대 초 미국은 28개 주였는데 대부분의 주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따라서 바쁜 농사철이 지난 다음인 추수감사절 이후에 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너무 추워져 투표장에 가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11월 초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문제는 요일을 정하는 것이었다. 아예 선거일을 5일, 7일, 10일 이렇게 정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교회를 가는 일요일과 겹칠 수 있어 일자를 못 박지 않고 요일로 정하기로 했다. 일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 중 월요일은 예배를 마치고 멀리 떨어진 투표장까지 가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탈락됐다. 토요일은 장이 서는 날이기 때문에 농사를 통해 거둔 작물을 내다 팔거나 다른 물건으로 바꿔야 하므로 역시 탈락! 금요일 역시 다음 날 장에 갈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탈락했다. 이제 남은 것은 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뿐이다. 이 중 목요일은 영국인들의 의회 선거일이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미국인들에게 목요일은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 결과 남게 된 건 화요일과 수요일이다. 그래서 화요일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일로, 그리고 수요일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거일로 정했다.
11월의 화요일 중에서도 첫 월요일이 낀 주의 화요일을 대통령 선거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순회 판사가 오는 날과 겹치지 않기 위해서다. 당시 매달 1일은 순회 판사가 오는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화요일에 걸리면 선거일과 순회 판사의 재판일자가 겹치게 된다. 따라서 최소한 11월의 첫 화요일 앞에 월요일이 먼저 오도록 해서 화요일이 11월 1일과 겹치는 것을 피하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 제도는 1844년부터 시행되었고 1872년에는 하원의원, 1914년부터는 상원의원 선거를 모두 같은 날에 실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