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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호퍼 Mar 16. 2021

선거인단, 엘리트주의와 노예제의 산물

선거인단 제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선거인단 제도'에 관한 트럼프의 말 뒤집기

2012년 11월의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뜬금없이  "선거인단 제도는 민주주의에 재앙이다"라는 트윗을 올렸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4년 뒤, 재앙이라며 비난했던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일반투표에서 54만 표를 뒤지고도 대통령에 당선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됐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 그는 다시 트윗을 올렸다.

"선거인단 제도는 작은 주를 포함해서 모든 주를 선거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면에서 정말 훌륭한 제도예요."


▲ 선거인단 제도에 관한 도널드 트럼프의 2012년 트윗(위)과 2016년 트윗(아래)
샘 모리슨이라는 27세의 사진작가는 이러한 ‘말 뒤집기(flip flops)’를 비꼬기 위해 트럼프의 모순된 트윗 두 개를 좌우에 새긴 슬리퍼를 1000개 만들어 인터넷에 판매했는데, 며칠 만에 완판 되었다.
▲ 선거인단 제도에 관한 트럼프의 모순된 트윗을 담은 샌들. 플립플롭은 일종의 슬리퍼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말이나 약속 등에 대한 번복’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미국인의 61%가 반대하고 있다. 모두의 표를 동등하게 선거 결과에 반영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수정안이 700차례 이상 의회에 제출되었다는 사실이 제도의 모순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도대체, 헌법 제정 당시 필라델피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55명의 헌법 입안자들은 무슨 이유로 선거인단 제도라는 신박하면서도 모순투성이의 제도를 발명해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17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통령을 의회로부터 보호하라.

영국과의 독립전쟁으로 미국인의 정치적 지위는 국왕의 ‘신민(臣民)’에서 미국의 ‘시민(市民)’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행정수반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주는 행정수반인 최고 행정관을 의회에서 선출했기 때문이다. 간접선거인 셈이다. 전체 13개 주에서 뉴햄프셔,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욕 등 4개 주만이 의회가 아닌 직접이든 간접이든 시민에 의한 선출방식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헌법제정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독립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였다. 만약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대통령은 ‘입법부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회의 영향 아래 놓인 대통령이 행정부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게 된다. 대통령의 연임이 의회에 달려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55명의 대표단이 가장 염려한 것은 대통령이 의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원들을 행정부의 각료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조지 메이슨이 일찍이 지적한 대로, 연임이 허용되는 한 대통령은 연임을 위해 ‘의회와 밀통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나친 민주주의'를 우려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직선제 방식으로 쉽게 합의될 수는 없었다. 대통령 후보자에 대해 유권자가 공정한 평가를 하고 현명하게 투표권을 행사하리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대표자는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상화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교통과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나온 후보에 대해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제대로 알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직선제 방식은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지적 수준이 낮은 데다가 충동적인 우매한 유권자에게 대통령 선출을 맡길 수 없다"는 왜곡된 '엘리트주의'가 밑바탕에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 더 큰 이유다.


일반 유권자들의 선거로 직접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명제는 현재의 기준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상식에 가깝지만, 당시 헌법제정회의에 모인 55명의 대표자에겐 '가당치도 않은 논리'였던 셈이다. 그들에겐 일반투표(popular vote)로 대통령을 뽑는 건 '지나친 민주주의(too much democracy)'이자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더구나 55명의 대표들조차 의회에서 간접 방식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인구가 적은 주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선거인단 제도라는 것을 풍자한 삽화

원초적 결함을 갖고 출발하다.

선거인단 제도는 태생적 결함을 안고 출발한 제도다. 인종 차별주의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선거인단 제도는 노예제 위에 군림하는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뤘던 남부의 정치적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제도라는 비판이 미국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헌법제정회의 당시 남부지역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했고, 노예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래서 흑인 노예가 적었던 북부 주들은 남부 주에 비해 인구수는 적었지만, 유권자 수는 훨씬 많았다. 노예제를 유지했던 남부 주는 직접선거를 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방식에 대해 쉽게 합의해 줄 수 없었다.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던 제임스 매디슨조차 남부 주의 견해를 반영해 이렇게 제안했다. 매디슨 자신도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직접 후보를 선출하는 제도를 섣불리 도입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많다. 그래서 직접 투표 대신 선거인(electors)을 뽑아 간접 투표를 하면 어려움 없이 책임 있는 선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루한 논쟁과 토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획기적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바로 ‘선거인단 제도’다. 선거인은 각 주의 상하 양원의 의석수만큼 선출하고, 과반수를 확보한 대통령 후보가 없으면 상원이 대통령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상원·하원의 의석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인구수가 많은 주의 이익을 반영하는 한편,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때는 각 주가 동등한 의석수를 갖는 상원에서 결정하게 함으로써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이익도 반영하는 신박한 절충안이었다. 그리고 남부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흑인 노예 한 사람을 5분의 3인으로 계산해 남부의 선거인단 수를 억지로 늘렸다. 구체적인 조항은 이렇다.

하원 의석은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해 배분한다. 각 주의 인구는 계약 노무자를 포함한 자유인(free persons)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indians)을 빼고, 그리고 나머지 사람의 3/5을 더해 계산한다.

여기서 '나머지 사람'은 노예를 의미한다. 헌법 제정 당시 미국 전체 노예의 93%가 남부 5개 주에 몰려 있었으니, 절충안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당연히 남부 주였다.


선거인단 제도는 어쩌면 당시로써는 그들이 도출할 수 있는 최선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대통령을 의회도 아니고 국민도 아닌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지구 상 유일무이한 국가가 되었다.

▲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민주당은 직접선거(일반투표) 방식을, 공화당은 간접선거(선거인단 제도)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풍자한 삽화

선거인단 제도는 바뀔 수 있을까?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미국의 헌법 개정은 먼저 상·하원 양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수정 헌법안에 찬성해야 발의된다. 이를 통과하면 4분의 3이 넘는 주에서 비준해야 비로소 수정헌법이 통과된다. 50개 주 중에서 38개 주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700차례 이상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거나 수정하는 내용으로 헌법 개정안이 의회에 제출됐지만 통과된 것은 하나도 없다. 상·하원 각각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공화당은 선거인단 제도를 지지하기 때문에 의회 조차 통과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주마다 이해관계가 제각각으로 다르다.  전체 50개 주에서 38개 이상의 찬성을 얻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구수가 문제다. 각 주에 배분되는 선거인단 수는 인구수를 고려한 하원의원 의석수로 규모가 결정되지만, 그 규모가 비례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주의 유권자 수는 와이오밍주의 유권자 수보다 약 55.6배 많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선거인단은 55명, 와이오밍주는 3명으로 18배 차이다. 즉 와이오밍주 유권자들이 과대 대표되고 캘리포니아주 유권자들은 과소 대표된다. 선거인단이 과대 대표된 주들은 인구수에 정확히 비례하는 헌법 개정안에 찬성할 이유가 없다

 

선거인단 제도가 21세기에 맞는 민주적 정치 제도인지 미국인 스스로 질문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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