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호퍼 May 24. 2021

1800년 대통령 선거와 결투

미국 정부의 아버지 해밀턴, 결투로 목숨을 잃다.

뮤지컬 <해밀턴>, 암표 가격이 2600만 원

2016년의 일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의 암표 가격이 2600만 원까지 치솟은 적이 있었다. <해밀턴>은 토니상 1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최우수작품상, 남자주연배우상 등 11개 부문을 수상한 브로드웨이 역대 최고의 히트작 중의 하나다. 2016년 당시는 필자가 워싱턴D.C의 주미대사관에 근무할 때였는데, 티켓값이 너무 비싸 뮤지컬  관람을 포기한 기억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 부부도 <해밀턴>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재임 당시 출연진 전원을 초청해서 백악관 앞뜰에서 야외공연을 가졌고, 퇴임 후에도 2차례나 공연장을 직접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토니상 시상식 축하공연에서도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 2016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해밀턴> 축하공연을 소개하는 오바바 대통령 부부(출처: 유튜브)

<해밀턴>의 작사·작곡자이자 해밀턴 역을 맡은 린 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는 2009년 5월 백악관에서 짧은 공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미란다는  백악관에서 당시 작업 중인 힙합 앨범의 랩 부분 공개했다. 미란다의 다소 엉성한 랩을 듣고는 객석에서는 헐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 부부 등 참석자 대부분은 미란다가 2008년 히트시킨 뮤지컬 <인더하이츠(In  The Heights)>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란다가 이날 선보인 랩은 6년 후 뮤지컬 <해밀턴>으로 탄생했다.

▲ 백악관에서 작업 중인 <해밀턴>의 일부분 랩을 선보이는 린 마누엘 미란다(출처: 유튜브)

미국 정부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

조지 워싱턴이 '국부(國父)'라면,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미국 정부의 아버지'다. 실제로, 해밀턴은 건국 초기 미국의 국가 형성에 가장 중요하고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정치인이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빚더미에 올라 있었던 신생 국가의 예산제도와 조세제도를 정비했고, 중앙은행 설립, 장기채 발행, 세관제도, 연안 경비대 창설 등을 주도하며 근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했다.

 

▲ 10달러 지폐 속 초상화의 인물인 알렉산더 해밀턴

해밀턴은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해밀턴의 어머니는 유부녀였는데, 제임스 해밀턴이라는 스코틀랜드 계 남성과의 사이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을 낳았다. 해밀턴의 어머니는 불륜을 들킨 후 살던 곳에서 쫓겨나 제임스 해밀턴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카리브해의 작은 섬인 네비스(Nevis)에 정착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교회는 두 사람이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밀턴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밀턴은 교회 부속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해밀턴이 아직 어렸을 때 두 모자를 남겨놓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해밀턴이 13살 때 어머니마저 사망하면서 해밀턴은 고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영특한 두뇌를 가진 해밀턴의 재능을 알아본 섬의 유지들이 십시일반 모아 준 돈으로 뉴욕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킹스칼리지(지금의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했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고전과 철학서적을 탐독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해밀턴은 군에 입대했고, 이때 조지 워싱턴 장군을 만났다. 인생 대반전의 계기를 맞은 것이다. 조지 워싱턴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한 후, 변호사로서 명성을 떨쳤고 정계에까지 진출하여 초대 재무장관에 올랐다.


정치인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연방주의자’로서 야심과 비전이 가득한  삶을 살다가 49세에 정적이었던 에런 버와의 결투에서 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해밀턴 죽음의 원인이 된 1800년 대통령 선거

1800년 대통령 선거는 혼돈 그 자체였다. 현직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현직 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맞붙은 선거였다. 1796년 대선에 이은 두 사람의 두 번째 맞대결이었다. 1796년 대선에선 애덤스가 제퍼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퍼슨은 차점자로 부통령이 되었다.


1800년 대선에서 애덤스와 제퍼슨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번에는 제퍼슨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기존 선거 방식대로라면, 가장 많은 표를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고, 그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을 애덤스가 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제퍼슨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같은 론 버(Aaron Burr)를 차점자로 부통령에 당선시키고, 애덤스를 낙선시키기 위한 기획을 하였다.  


결과는 제퍼슨과 버가 선거인단 표 73표씩을  획득했고, 애덤스는 65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1개 주(州)가 2표를 행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덤스를 부통령 자리에서마저 낙선시키려는 제퍼슨의 계획이 일단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동점인 제퍼슨과 버를 대상으로 하원에서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을 가려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하원 결선투표에서 문제에 봉착했다. 결선투표에서는 1주가 1표씩만 투표할 수 있었는데, 연방파가 제퍼슨 대신 버를 대통령으로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하원에서 35차례나 투표를 실시했지만 어느 누구도 과반수 표를 얻지 못했다. 과반수를 얻는 후보자가 끝내 나오지 않으면 대통령 없이 새 정부가 출발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연방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던 해밀턴은 제퍼슨과는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해밀턴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정적(政敵)인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정치인 버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해밀턴은 버를 정치 철학도 없이 단지 사익이나 챙기는 사이비 정치인으로 평가했고, 정치 철학과 정책이 연방파와는 다르지만 차라리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국가를 위해선 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해밀턴의 지지 덕분에 제퍼슨은 36차 하원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버는 부통령이 되었다.


▲ 결투를 벌이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출처: 위키백과)

해밀턴, 결투로 목숨을 잃다.

1800년 대통령 선거는 현직 부통령과 재무장관의 목숨을 건 결투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800년 대선에서 해밀턴은 “런 버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한 것이다. 낙선한 버는 해밀턴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이 골수에 맺혔다. 이후 재무장관인 해밀턴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사사건건 훼방을 놓자 이를 참지 못한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해밀턴은 장남이 결투로 목숨을 잃은 아픔이 있기 때문에 결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투를 피하면 두고두고 겁쟁이라며 놀림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마지못해 결투에 응했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뉴욕 주가 결투를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뉴저지까지 건너가서 결투를 벌였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총을 겨누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버의 총에서 총알이 먼저 발사되었다. 해밀턴은 오른쪽 골반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총알이 척추까지 관통했다. 그리고 이 후유증으로 사흘 만에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토머스 제퍼슨은 런 버를 비록 정적(政敵)이긴 하지만 선의의 경쟁자로서 인정하고 부통령으로서도 존중해줬다. 그러나 결투 사건이 발생하자 버에 대한 제퍼슨의 실망은 극에 달했다. 결국, 제퍼슨은 버가 두 번 다시는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에 버는 크게 앙심을 품고 180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버는 당시 유럽의 권력자인 나폴레옹에게 접근해서 미국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자신의 조국을 배신한 것이다. 버가 개인감정으로 미국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안 나폴레옹은 버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다. 1812년까지도 나폴레옹을 설득하지 못한 버는 결국 미국으로 다시 귀국해서 쓸쓸히 여생을 마쳤다.


▲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후손들이 당시 결투 모습을 재연하는 장면(출처: 유튜브)

결투 사건으로부터 200년 후인 2004년 7월 11일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후손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을 TV 방송에서 재연한 뒤 서로 화해했다. 에런 버의 역할은 애런 버의 사촌이, 알렉산더 해밀턴의 역할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5대손이 맡았고, 실탄이 장전된 권총 대신 공포탄으로 재연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00년 대선의 트라우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