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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bj Jan 22. 2023

잘해보고 싶다고 말할 용기

내 안의 신포도 들여다보기

  발버둥 치고 애쓰며 남들을 제치고 올라가 빛나는 삶에 대해 큰 취미가 없이 살아온 나였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입에 달고 살던 말은 "나는 진짜 연예인 시켜줘도 안 할 거다" "여자아이돌 시켜줘도 안 할 거다" "대통령 시켜줘도 안 할 거다" "국회의원 시켜줘도 안 할 거다". 수많은 삐까뻔쩍한 직업들이 내게 '0고백 1차임' 당했다.


  이너피스를 중시하는 나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세계로 보였기 때문이다. '연예인'같은 직업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척 왈가왈부할 인간들이 느는 것이 싫었다. [니들이 뭔디요], '공직자·국회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무슨 상관이죠]

  아니 일정을 보면 무슨 새벽같이 일어나서 민생 행보를 이어가고 팬들에게 오글거리는 말을 남기고 활동 내내 외모에 대해 나노단위로 신경 써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면 마음에도 없는 말도 자주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내뱉으면서 '인기'를 많이 얻어야 하는 직업..

  분명 인성 논란이 불거지며 커리어 나락 갈 승질머리다.


  내가 중시한다고 생각하는 알맹이와는 다소 동떨어진 '겉모습'이나 '대중의 인기'가 생계와 직결되고, 경제적 여유는 있을지 몰라도 일상의 여유가 부족한 삶을 원치 않아 온다고 스스로를 정의해 왔다.


   다소 다른 맥락일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경쟁이 심한 업계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그간의 부서들 특성 탓인지 별 '단독 경쟁' 같은 데에 뛰어들어본 적도 그런 데서 이름을 날리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단독을 한단 건 전혀 아니다. 존재감을 타인의 인정에서 느끼는 면이 조금은 있다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1인분은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정도야 있다고 자부한건만서도 어떤 일에 대해 안간힘을 쓰고 더 잘해보려는, 특히 남보다 탁월한 아웃풋으로 돋보이려는 사람들을 보면 모종의 존경심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 "저걸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최근 스스로에 대한 관성적인 정의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 때문이다.


  설날 연휴를 앞둔 한 금요일 평화로운 오후, 출입처에서 자료가 나와 기계적으로 인터넷용 단신을 작성하겠다고 보고하고 기사를 쓰는 중이었다. 코로나19 관련 방역 규제가 완화되면서 2022년 우리나라 출입국자 수가 전년에 비해 362% 폭증했다는 제목의 보도자료였다.


  별 영혼 없이 기사를 써 내려가는데, 일곱 자리가 넘는 수치가 여럿 나열되다 보니 2021년(전년)과 2022년의 출입국자로 제시된 사람 수 차이를 한 번 더 풀어쓰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직접 계산기를 들고 계산을 해봤다.

수치 차이가 도출된 김에, 이게 정말 전년도의 362%가 맞는지 한 번 더 계산을 해봤다. 굉장히 쉬운 산수였다. (2022년도 수-2021년도 수) / 2021년도 수 = 3.62가 나오면 됐겠지.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한 번 해본 거였다.

받은 자료

안 나왔다

?? 

3.257이라는 다소 다른 숫자가 나왔다. 내가 계산을 잘 못했나 싶어 눈을 씻고 10번 정도를 다시 해봐도 똑같은 수치가 나왔다. '이렇게 기본적인 산수를 법을 다루는 공공기관에서 틀릴 리가 있나..? 중간에 잠시 언급되는 퍼센티지도 아니고, 제목인데'.


  료가 나온지 30분쯤 지나고 손가락 빠른 여러 언론들은 이미 보도자료 수치와 내용을 담은 인터넷 기사를 양산한 지 오래였다. 모두 362%라고 썼다. 엥 그럼 맞을 텐데. 내가 잘못한 건가? 다시 해봐도 아무리 해도 362%는 아니었다. 아닌 것 같은디.


  고민하다 홍보 담당에게 전화를 걸었고, 콜백 주겠단 답을 받았다. 팀에는 단신 작성 마쳐두긴 했지만 수치 오류가 있는 것 같기도 해 문의해 둬 답 오면 쓰겠다고 했다.


  "띠링" 1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개인적인 콜백 대신 공지방에 수정된 자료가 올라왔다.

325.7%여서 326%인데, 담당 직원 실수로 2와 6 자리가 바뀌었다 한다. 별 큰 일 아니긴 하다.

헐. 연합뉴스를 포함한 지상파 등 유수 언론사도, 출입처의 보도자료를 담당하는 부서도 틀리고 내가 맞았던 거다. 일개 특색 없는 언론사에서 무명 DBJ(듣보잡) 기자로서 보도자료나 묵묵히 받아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내가!

1/21 현재 아직도 수많은 언론사가 오류 그대로 뒀다

공지 직후 담당관에게 '아이고 부끄럽습니다'라는 멋쩍은 사과 전화가 왔다. '아이고 아닙니다' 웃으며 알 수 없는 자기애와 승리감에 젖어 남은 하루를 보내고, 기사 작성을 마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왜 이리 별 것도 아닌 걸로 기분 좋은 걸까 스스로를 돌아봤다.


내가 내린 결론


웃기게도 이 날은 출입기자로서 출입처에 처음으로 지적을 하고, 이들이 내 지적을 수용해 잘못을 바로잡고 죄송하다고 했던 날이었다. 출입한 지 2달 남짓된 생 초짜긴 하지만, 드디어 출입처에 나름의 '영향력'을 끼치며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호들갑 오지는 자의식 과잉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쓰는 글. 그럼에도 알 게 뭐야 내가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는데.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내가 기분이 좋으면 그만인' 순간을 늘려가고 싶던 나였는데,

그럼 나는 남에게 기자로서 지적을 하고 그 바를 받아들여서 영향력을 끼치면 조그만 변화를 이끌어가는 걸 좋아하는 건가? 그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 에피소드였다.


어쩌면 나, 능력으로 주목받고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욕심이 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일 걸 알아서 내 능력에 자신이 없어서 난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판단해 버렸던 건 아닐까.


  애써서 이런 성취를 얻었던 이들도 이런 맛에 중독돼서 열정을 불태우며 단독 경쟁, 워커홀릭이 되었던 건 아닐까.

  '아니 저래서 남는 게 뭐지'거리며 그들의 열정을 '허튼짓'으로 후려치고 싶은 목소리가 내 안에 있던 게 아닐까. 아직도 뭐 그리 허쓸하며 워라밸을 망치는 참기자가 될 열정까지는 없는 나지만


오늘 같은 기분을 더 자주 느낄 수 있었더라면, 그럴 능력을 내가 갖췄더라면 사표 같은 건 내지 않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어쩌면 나, 능력만 된다면 남들보다 탁월한 성과로 빛나는 삶도 살아보고 싶은 거 아닐까?


나보다 더 호들갑 떨어준 웃기는 짜장면 친구

비약이 웅장하지만..

좀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사실 충격이기도 했다. 너무 기본적인 산수인데, 이걸 팩트체크해 본 언론사가 나 외에는 정말 아무 곳도 없이 다들 그대로 복붙만 했다고?

때로는 기본에 충실하기만 해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이 역설적이게도 단독 경쟁이 가장 치열한 이 무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자료를 수정한 게 나라는 사실은 내 가까운 친구들 외에 출입기자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거 읽는 분들만 앎. 알 게 뭐야, 내가 기분이 좋다는데. 룰루


새해를 맞아 약간의 동기부여도 됐다.


  본이 된 사람이 되어야지.

  빠르게보다 정확하게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남을 후려치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잘 익은 포도 앞에서 사실 이 포도 내게는 손이 닿지 않지만 맛일랑 없고 나 포도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백하며. 귀엽고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지

125. 사랑하는 소로의 문장으로 마무리



언제나 낯선 사람처럼 여전히 내가 알고 싶어지


여전히 아이돌이나 국회의원 생각은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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