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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bj May 28. 2023

아나운서 안 되길 정말 잘했다

그때는 되고팠고 지금은 아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연휴
출연 녹화를 마치고 축축 습한 공기의 버스에서 기록.


한 번씩 스튜디오 출연은 나름의 재미가 있긴 한데.
5시 분장실에서 메이크업받고부터 6시 녹화까지 중간중간 멍 때리며 감히 해본 불경한 생각은

 '나 아나운서 안 되길 정말 잘했다'

피사체가 되어 남들의 붓질에 내 이목구비를 힘 푼 채 맡기는 일. 의미 없고 피곤하다..

내 앞머리 옆머리 뽕을 위해 10여 분 간 분노의 꼬리빗질을 해주신 분장쌤. 아 감사하긴 한데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면에 몇 분 나오지도 않고 그 머리가 그 머리 같은데. 누가 나 따위 옆머리의 정갈함 여부에 이 정도로 신경 써준다고? 미친 자기 객관화가 발동해 버린

물론 저는 자타공인 개막눈이긴 합니다.

수면아래에서는 겁나게 발길질을 해야 하는 게 방송조명 아래 화려한 백조덜의 숙명인가

내내 든 생각은 '대충 하셔도 되는데..', '배고파 뒤지겠네..'

재수 없게도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런 무거운 메이크업을 얹지 않은 내 모습도 이미 충분히 마음에 드는 덕분이다.

음.. 떡칠하면 더 나아지는 것 같긴 한데, 귀찮아..
원래도 나름 예쁘장하게 생긴 것 같구만. 차라리 안 귀찮고 덜 마음에 들고 자유롭고 싶다.


평생 눈화장을 안 해온 이유기도. 못생긴 나도 괜찮다기보단 운 좋게 내가 대충 내 취향으로 생겼달까

메이크업 후가 아주 찰떡으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대충 더 새하얗고 뽀샤시해지긴 하는데 뭘 더 요구해야 더 나은지 모르기도 하고, 화장 지우기도 귀찮고.

특히 내가 원하는 스타일, 뭐 그런 거 대로도 아니고 대충 정갈하게 해주는 거자녀

마음만은 거의 모

영국 왕실에 갇힌 다이애나 왕세자비임

안 그래도 얇은 제 머리를 한 순간의 뽕을 위해 그렇게 박박 원래 결과 반대로 후까시를 넣어 빗어버리시면, 저는 스튜디오 안 3분 이후의 삶을 이 상처받은 머릿결과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다,
나는 잠깐 화면 속에서 빤짝 빛나는 데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일에는 크게 열심일 수가 없는 성정의 게으른 인간이었던 거다!

하고 싶다고 믿었던 일이 사실은 잘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이었던 게다!

내가 KBS 아나운서 3차 면접에서 붙고 최종합격까지 했다면 과연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전혀 아닐 것 같다.

아나운서라는 꿈을 혹여 이뤄버렸더라면 이놈의 짓거리를 그야말로 매일 해야 허잖아..

외모를 꾸미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객관적 출연 실력도 여전히 사내에서도 그리 상위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 되길 잘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퍽 반가운 일이다. 아나운서의 꿈이 아니고라도 내가 한때 놓쳐 아쉬워 마지않던 무언가가 사실은 내게 맞지 않는 구두였음을 훗날 깨닫고 미련 없이 웃을 수 있다는 것

정신승리일지도, 신포도일 수도 있지만. 현재에 집중하게 한다.

 내 손아귀를 빠져나간 기회와 인연들도 언젠가 돌아보면 그럴만했던 이유가 있었으리라, 더 홀가분히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your destiny may keep you warm~

6년 전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울었던 키가 작진 않은 꼬마 아갓씨..

본인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며 20대 후반을 주름잡던 나름 간절했던 꿈과 쿨하게 이별을 마쳤다.

이 역시 꿈의 근처라도 와봤기에 가능한 일이기에 감사하기도 하다.

출연 전 메이크업 때마다 '언니! 대충 아무렇게나 갈겨버리세요!' 생각하며

출연 후 집에서 '아오 귀찮아' 메이크업을 빠득빠득 지우며

속으로 외친다​​

아나운서 안 돼서 정말 다행이다!

진심이다.


근디 이글 쓰며 거울 한 번 보니 또 오늘 메컵이 맘에 들긴 한다.


가끔씩 출연 정돈 오키!


*아, 저는 2년 정도 아나운서 준비를 한 이력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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