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행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차치하고, 영화의 작품성도 차치하고. 그저 그가 만들어내는 화면 속 상황들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좋아한다. 그냥 유튜브 콩트 채널을 하나 구독하는 느낌이랄까.
뭐가 그렇게 웃기냐면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담기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찌질함이 웃기다. 예컨대 최애 영화 중 하나인 <북촌 방향>에서 내가 꼽는 명대사란 이런 것이다.
유준상 내레이션 : (어색한 남녀 앞에서 잘 보이려 피아노를 치기 위해 의자에 앉으며) 너무 긴장해서 겨드랑이에 땀이 다 난다.
아, 영화 속에서 유준상 표정과 목소리로 들으면 더 웃긴데! 쓰니까 안 웃기네. 이것도 홍상수 능력.
긴장할 법한 상황이라는 걸 보여주기만 하는 것과 1인칭 시점의 주인공 목소리로 싸질러버리는 것은 아주 다르다. 되게 눈을 뜨고는 볼 수가 없이 찌질하고 부끄럽다. 그래서 그냥 눈을 접고 인상 쓰며 웃어버리게 된다. 이밖에도 인물 각자가 우스꽝스러운 이유도 제각각인데 크게 둘로 나누자면 어떤 상황이 너무나 날것이고 솔직해서, 혹은 너무나도 솔직하지 못해서.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서이다.
1) 나도 한 번쯤 처해본 적 있는 민망하고 볼품없는 상황, 기분, 상상, 생각을 그대로 표정으로, 대사로 내뱉는다. 장면으로 그려낸다. @유준상 사례
2) 혹은 그를 철저히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드러나게 연기한다.
3) 그런 의도가 빤히 보이는 대사, 행동을 반복한다.
대부분 하하하 박장대소하기보다는 풉. 뭘 뿜고 싶게 비웃고 싶게 저항 없이 웃기다.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연주해내는 남자가 나오는 장면을 담은 영화는 많아도 그 순간 겨드랑이에 맺힌 땀에 대해 읊조리는 내레이션을 담는 영화는 많지 않다.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이런 날 것의 감성이 홍상수를 대체불가능한 감독으로 만드는 데에 상당 부분 기여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바야흐로 느슨해진 한국 예능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홍상수가 등장했다. 날 것의 대가, 남규홍.
남규홍, 당신을 예능계의 홍상수로 임명합니다
나는 솔로 16기 돌싱특집에 국민적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연애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실험 다큐 같다 ‘ ’시트콤이냐’ ‘사이코드라마냐’ ‘어떻게 저런 사람들만 데려다 놨냐’ ‘다들 너무 이상한데 너무 웃기다’ ’내가 다 부끄럽다‘ ‘생각해 보면 나도 저런 면이 있는데 거울치료된다 ‘
찬사 맞냐고? 남 PD는 아마 이런 반응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칸 영화제에 가는 걸 바라보던 홍상수 감독의 심정으로.
케케케케 @남규홍 나는솔로 pd 그리고 며칠 전 나온 씨네 21 인터뷰, 내 추리는 정확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만 데려다 놨냐고? 어떻게 이런 찌질한 사람들만 그리느냐고? 남규홍 pd와 홍상수 감독은 모두 같은 대답을 내놓으리라 확신한다. “당신 주변이라고 이런 사람이 없는 것 같나? 아니, 그전에 당신이라고 안 그런 것 같나?”
홍상수 냄새가 나는 나는 솔로 대표 빌런의 면모를 재미 삼아 분석해 봤다. 첫 째, 속이 빤히 보이는 허세. 둘째, 비대한 자아. 그리고 둘을 드러내기를 반복하기. 홍상수 감독 영화는 본 지 시간이 꽤 지나 디테일이 가물가물하니 나는 솔로만 예로 들어보겠다.
1. 자기 연민과 허세
16기의 히로인은 단언컨대 영숙. 노골적으로 호감을 드러내며 구애하는 상철에게 시종일관 가시 돋친 말로 툴툴대고 밀어낸다. '아가' '얼라'라고 미성숙한 취급 하며 내려다본다. 미국에 데려갈 배우자를 찾자 본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관전 포인트는 이런 '말'과는 다른 그녀의 행동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저항 없이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기, 여자들의 선택 시간에 그가 지나가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쫓아가는 종종걸음 같은 것.
상철이 없는 곳에서 이뤄지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는 '상철님을 내가 많이 좋아하니까'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매력 덩거리'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돌아간 솔로나라에선 또다시 한껏 가시를 세우고 센 척을 반복한다.
유치하다. 어쩔수 없이 상철을 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 서사에 빠져 허우적대는 비련의 여주인공, 드라마퀸이다. 사랑하니까 보내줄게, 상철. 내 커리어를 위해. 이 멋진 내가! 보다 보면 '왜 저래' 싶다가도 풉 웃게 된다. 홍상수 영화를 볼 때처럼.
2. 비대한 자아
선무당 영철은 참지 않는다. 남들의 애정전선에 적극 개입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니까'. 님이 뉘신지 참으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궁금하건 말건 그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게 나니까. 그나마 그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자면 나라도 되니 이 판을 다 읽을 수 있고, 나는 이미 정숙과 러브라인도 확고해 다른 이들 사이에 끼어 방해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관전포인트는 그의 넘겨짚기가 선무당의 그것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빗나간다는 점이다. 광수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옥순은 광수에 진심이었고, '상철에 대한 마음이 너무 얇다'는 영숙은 제작진과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터뜨린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한 과신이 없었다면 감히 싸지를 수 없는 일들을 그는 시원시원하게 속단하고, 거짓뉴스를 부지런히 퍼뜨리며 남의 청춘사업을 말아먹는다. 그리고는 미안하다 사과 한 마디 없다. 죄송한데 참으로 극혐이다.
그런데, 중독성 있다. 홍상수 영화에서 끊임없이 젊은 여자를 꼬드기려는 늙수그레한 감독들의 실없는 여자 칭찬처럼. 허황되고 잘못되고 거짓됐는데, 웃기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뻔히 보여서. 그의 비위 상하는 자기 인식이 보여서. 찌질해서. 거기에 누군가들이 겹쳐 보여서.
둘의 모습엔 가끔 내가 보인다. 어릴 적, 혹은 지금도 나의 일부인 내 모습도. 거절당할까 봐 먼저 거절하고 그런 나도 사랑해 주기를 바라던 나. 나만의 고유하고 슬픈 사연이 있고 그로 인해 어두운 구석이 있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하던 나.
주변 사람도 보인다. 상대의 의사는 아랑곳 않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꾸 설명하려 들던 친구. 본인이 지닌 아픔이, 동시에 그로 인해 길러진 본인의 감수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친구. 즐거운 술자리에 찬물을 끼얹으며 자신의 눈물의 출처를 설명해 주던 친구. 본인의 호불호와 상처를 목놓아 외치던 친구.
비대한 자아, 자기 연민, 허세 개노답 삼 형제의 반복을 비단 나는 솔로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내면과 주변에서 꽤 자주 목격하며 살아온 것이다.
간증 자료로서 가장 최근의 목격담 하나를 기록해 본다.
꼭, 여기서 만났어야 했냐?
입사 동기 B와 둘이서 간단히 먹으려던 저녁 식사 자리, 나는 예고 없이 A를 초대했다. 최근 그에게 지니고 있던 불만을 이참에 편하게 얘기하고 잘 푸려는 의도였다.
불만 사항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최근의 이별 이후 부쩍 늘어난 그의 무지성 찡찡. 작작하라고 경종을 울리려 했다. 길게 설명할 순 없지만 선을 세게 넘으셨어서. 굉장히 화나지만 좋게 이야기하리라, A가 도착하기 전 한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각 1인분씩의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쯤에야 A가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얼굴의 땀을 닦는 듯했다. 한여름의 불볕더위는 가셨다고 생각했는데 A는 생각보다 더위를 제법 타는구나 싶던 찰나, 아뿔싸. 자세히 보니 그가 닦고 있던 건 땀이 아니었다. 눈물이었다.
"시발, 꼭 여기서 만났어야 했냐…."
우리가 만난 곳은 마포역 인근의 한 대중적인 곱창집. 오기 싫었으면 오지를 말지 이게 웬 곱창 먹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했다.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걔랑 세 번째로 만나서 사귀자 했던 골목이야…."
둘은 소개팅 이후 4번째 만남에 사귀었고, 그 후 한 차례 더 만난 뒤 일주일 만에 결별한 사이다. 이런 사이를 우리는 보통 굉장히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라고들 한다. 그렇다. 그를 한 달째 그저 오열의 숲으로 몰아넣고 있는 세기의 사랑은 단 일주일자리 연애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여성분은 이미 그의 과몰입에 화들짝 놀라 달아나신 지 오래.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오열을 시작한 한 남성 앞 달아날 타이밍을 놓친 우리는 그저 달래줄 수밖에는 없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잉된 감정으로 쏟아붓는 카톡을 받아주기 힘들어 '저 염병이 치유되기 전까지는 다시는 그를 절대 만나지 않으리' 다짐한 나쁜 나였다 그 결심을 풀고 제대로 대화해보려고 한 건데.. 말도 못 꺼내보고 또다시 ㅈ된 거다.
일단 곱창도 다 먹었겠다 2차를 가자며 한 바로 향했다. 거기서 그의 2차 오열이 시작됐다.
산 미구엘 싫다고, 시발!
셋이서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나니 밤 10시쯤, B와 나는 일어서려 했다. A는 막아섰다. 와인 한 병 더 먹자고. 와인은 너무 헤비하니 간단히 맥주 한 잔 정도씩 더 먹자고 겨우 합의를 봤다.
"여기 맥주 있나요?"
"네, 산 미구엘만 있어요."
그때였다.
"산 미구엘 싫다고 시발!!"
?
사장님과 나와 B는 그저 벙찔 뿐이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걔가... 제일 좋아하던 거야."
"그냥 산미구엘 주세요, 사장님"
제발 염병 좀 그만하라고 일침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는 차마 그럴 수 없게 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감정의 속도와 깊이는 만난 시간에 비례하지만은 않는다지만, 좀 심하다. 사장님도, 나름대로 고심해서 들여오신 맥주였을텐데..
다음날, B와 만나서는 그날의 기묘했던 경험에 대해 곱씹었다.
B "나 정말 그런 사람 처음 봐."
나 "너 나는 솔로 16기 봤어? 딱 그런 사람 나와 영숙이라고."
그리고 우린 결론을 내렸다.
"아. 남 pd 님이 특별히 복이 많으신 건 아닐 수도 있겠다."
남규홍 PD의 나는 솔로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분명 우리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의 모습이 녹아있다. 한없이 찌질하고 과잉된. 그게 두 아티스트 작품의 인기의 비결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디서 본 듯 익숙한 찌질한 인간군상의 뒷모습이..우리 모두는 너무 이상하고 너무 웃긴 면모가 있다.
덮어놓고 출연진만 욕할 것이 아니라, 이 참에 거울 치료의 효과도 실제로 나 포함 많은 분들이 얻어가셨으면 좋겠다.
신형철 평론가도 자신의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그리 말했지 않은가.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