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간밤 산타에게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았어. 내 생각보다 네가 일찍 도착한 모양이야. 언젠가 내가 꼭 가고 싶다고 했던 남국의 투명한 바닷가에, 그 하얀 모래사장에 네가 있었어. 그리고 꼬맹이 둘이 의자에 앉아 아주 간단한 멜로디를 반복해서 쳤지. 글쎄 난 너인줄 한눈에 알아봤다니까. 다리에 그렇게 긁힌 자국을 가진 피아노가 어디 또 있겠어. 보나마나 너지. 누군가 네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면 투정하러 오라고 했는데 크리스마스에 딱 맞춰서 왔구나. 물론 꿈속의 그런 근사한 바닷가에 서있지는 않겠지만, 분명 그렇게 푸른 소리를 낼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어.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방 정리를 하는데 이삿짐을 옮기느라 열어보지 못한 편지 상자 안에 내가 네게 썼던 편지가 있더라. 미처 전해주지 못했으니까. 여기 쓸게.
여자아이는 피아노학원 남자아이는 태권도도장에 보내던 그때. 나는 당연히 태권도도장에 가고 싶었지만 쉽게 저지당했어. 피아노는 좋았지만 싫었지. 사과를 다섯 개 다 칠해야 겨우 방 밖을 나갈 수 있는 것도 싫고, 손님이 올 때만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의 목소리도 미웠어. 가정집 구석구석에 피아노를 둔 그 학원은 창고에선 물이 새고 겨울엔 손이 얼어 피아노를 못 칠 만큼 추웠으니까. 물론 신기하고 좋은 것들도 많았어. 그 학원 거실에 장식처럼 꽂혀 있던 동화책도 소설책도 난 다 보았고, 가끔 선생님이 데려가주었던 연주회는 꼭 별나라 사람들의 파티 같았어. 음악을 듣고 꽃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축하하는 거. 그런 동화책에서 본 파티.
중학생이 되면 음악을 하는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은 갈라져. 그때쯤 되면 취미로 치는 아이 엄마들은 더 이상 피아노학원에 보내지 않아. 나도 그렇게 그만두게 되었잖아. 선생님은 내게 마지막으로 딱 두곡을 가르쳤어. 어디서든 칠 수 있는 걸로 하나, 흔하진 않지만 꼭 날 닮은 걸로 하나. 그 뒤로 내 피아노는 늘지 않았지만, 괜찮았어. 나한테는 네가 있었으니까. 언제든 방문을 열거나 옥탑에 가면 널 칠 수 있었으니까. 재능이 없어도 음악이 좋은 나에게 너는 위안이었고, 때론 꿈의 표출이었어. 가끔은 자랑이 되고. 엄마가 직접 만든 커버를 두른 피아노. 착하디 착해서 어디 음도 쉽게 고장 나지 않은 피아노. 엄마는 몇 번 방을 고치거나 옮겨야할 때 피아노를 판다고 했고, 그때마다 내가 위에 올라가서 자겠다며 버텼잖아. 그런데 이제 정말로 내가 너와 헤어져야해. 우리가 있는 이 집이 헐린대. 우리 집이 여기가 아니게 된대. 집이 여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피아노가 나에게 없어지는 건 더 이상해. 엄마가 이 사실을 통보했을 때, 내가 견딜 수 없는 마음에 마구 말을 쏟아낼 때. 같이 밥 먹던 친구가 말했어.
피아노에게 판다는 말은 사형선고라고.
그래 우린 시한부다. 그지. 네가 있는 옥탑은 겨울엔 정말 너무 추워. 그래도 난 이제부터 매일 조금씩 네가 마지막에 연주할 곡을 준비할 거야. 평생 내 인생에 첫 피아노는 너야. 그리고 아마 마지막도 너일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 애매한 피아노를 네가 가장 많이 들었을 텐데. 마지막은 애매하지 않게 할게. 어쩌지 나는 벌써 눈물이 나. 우리 같이 정말 잘 지냈는데. 네가 내 옆에 없는 건 정말 너무 이상할 것 같은데. 중간 중간 또 편지 쓸게. 오늘 옥탑은 좀 차가울 텐데. 잘 자. 해 뜨면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