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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Nov 29. 2018

이제,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을 너에게

피아노

 


 어느 먼 곳의 땅에서 씨앗으로 자란 네가 나무가 되고, 누군가가 너를 골라서 피아노가 될 운명을 주었겠지. 소리가 날 때까지 널 몇 번이고 가르고 두드리고 맞춰보았을 거야. 그런 네가 수 없이 많은 형제들과 함께 번호를 받아서 어딘가의 전시장에 놓였다가, 누군가의 집에서 살다가, 어린 여덟 살의 나를 만나러 왔지. 사실 나는 새 피아노를 갖고 싶었어. 그래서 널 선택했다고 했을 때 투정을 엄청 많이 했지. 이렇게 근사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에게 너는 가장 오랜 친구였어. 사실 내겐 너무 버거운 가짜들을 많이 가졌던 날들에도. 나를 사랑하기에 너무 괴로웠던 날들에도. 내가 진짜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던 날들에도. 나는 네가 대답을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거짓말과 고민들의 결말을 네게 고해바쳤어. 그리고 너는 그냥 늘 그 자리에 있었어. 그냥 그게 전부였지. 엄마와 크게 싸우고,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내내 알 수 없는 불협화음을 쳐대며 울기도 하고, 첫사랑이 좋아한다는 밴드의 노래를 쳐주려고 몇 번이고 밤늦게 연습하다 혼나고. 멀리 떠나는 친구의 앞날을 축하하는 노래를 만들고. 유행하던 노래와 꼭 한 군데 이상 틀리던 가창 시험 곡까지도 너는 다 알고 있지. 가끔 생의 어딘가에서 피아노들을 마주치면 ‘에이 뭐 우리 집에도 피아노 있어!’하고 피식 지나갔었어. 그거야 늘 문을 열면 네가 거기 있었으니까. 피아노 방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데다가 인터넷도 자꾸 끊기는 섬과 같은 방이어서 난 더 게을렀어.      


아마 나는 너와 내가 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야.     


 사랑이 끝나고, 아꼈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못하게 되거나, 내가 아파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이 와도. 너는 늘 거기서 날 기다려주고 있을 나의 피아노였고. 그건 내가 의심할 필요가 없는 명제였는데. 그런데 내가 이사를 간대. 그리고 우리가 헤어져야 한대. 전화 한 통과 사진 두 장으로 네게 붙은 가격은 너무 처량하게 싸더라. 난 이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널 살 수 있는 지갑이 있는데, 그 안에 널 둘 작은 공간을 살 돈이 없어서. 너를 보낼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낼만큼 혼자 서지 못해서. 결국 너를 데려가지 못했어.

 너처럼 구석에서 낡은 피아노들은 종종 부서지고 멈춰진대서 정말 걱정했는데. 다행히 너는 근사하게 시간을 맞이해서 여기 이 땅은 아니지만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너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네가 다시 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이라도 거기 네가 있다면 그거면 돼. 살면서 뭐 그리 짐이 많다고 네 위에 가득 물건을 올려두고 살았는지. 모든 걸 두고 가벼워진 너의 뚜껑을 열고 소리를 내보았어. 가정집이라 항상 소리를 죽이고 줄이는 데만 신경 써왔지. 공간 전체에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너무 예뻤어. 혼자서도 그 자리를 다 채우다니, 역시 너야. 마지막 밤은 내내 울면서 쳤어. 너도 알지? 평소에 연습도 게을렀으니 내가 칠 수 있는 곡이라고 뭐 있겠어. 그냥 우리 다 아는 맨날 치던 걸 또 치는 거지. 네가 제일 먼저 들었을 노래들. 그중에 몇은 카메라로 남겨두었어. 걱정 마. 너 엄청 예쁘게 잘 나오니까. 언제 다시 꺼내서 볼지 모르지만 때로는 생에 돌아올 수 없는 어느 순간을 남겨뒀던 것이 남은 생에 큰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고.     


 아침 열 시. 마지막으로 널 데리고 내가 만든 변주곡을 치는데 소리가 들려.

 

 똑똑.

 아저씨들이 왔어.     


 우리 함께 남긴 마지막 녹음에 그대로 남았을 거야. ‘이제 그만 쳐 ‘라는 선고가 들리고. 내가 끝내 일어서고. 아저씨들은 널 두드려보고,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던 너의 안을 들어내고. 가격을 매겼어. 많이 아프고 놀랐지. 나는 피아노가 그렇게 분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너는 내게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왔기에. 나는 으레 피아노는 원래 그렇게 완전하게 오는 줄 알았지. 피아노의 해머를 뽑으면 그때부턴 소리가 안 나. 아니 소리를 못 내지. 그게 빠진 채로 18년 만에 네가 바깥에 나왔어. 볕 아래의 너는 여전히 처음 온 날처럼 나무의 색 그대로 빛이 나더라. 이런 볕 아래서 널 쳐보지 못한 게 마냥 아팠는데. 그 와중에도 네가 예뻐서 울면서도 웃었어. 그렇게 쓱 밀면 밀리는 줄 알았으면 데리고 나가서 해도 달도 좀 보여줄걸. 


 

 계단을 하나하나씩 꼭 장지로 따르는 사람처럼 한발 한발 갔어. 아 물론 네가 죽었다는 건 아냐. 네가 왜 죽어. 어디선가 반드시 소리를 낼 텐데. 네가 왜 죽어. 다 내려가서 지상에 닿은 너를 다시 조립하고 끝내 차에 태우는 순간, 나는 너의 대답을 들었어.


 c3. 도


 피아노 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자리. 내가 제일 많이 쳤을 자리. 네게 대답을 들었으니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어. 하염없이 우는 내 앞에서 아저씨들은 구십 도로 인사하고 차에 탔고 나도 구십 도로 인사했어.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면서. 우리 집엔 창문이 작아서 내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가도 널 볼 수 있는 골목의 끝이 정해져 있더라. 네가 떠날 때에서야 네 앞에 친구가 있는 걸 알았어.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피아노를 보냈겠지. 네가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 

 지금쯤 어디에 있니? 어느 어두운 창고에서 낮을 기다릴 수도 있겠지. 네가 있던 그 자리는 아직 그대로야. 볕이 닿지 않아서 하얀 벽지와 네가 두 다리로 지그시 누르고 있었을 장판까지 전부. 그때 본 그 친구랑 잘 지내다가, 새 곳으로 떠나서 어디선가 소리를 내게 되면. 네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올라앉아서 연주를 시작하면. 그때는 꼭 꿈에 와서 말해줘.     


 아 입 다물고 있느라

 진짜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잔뜩 푸념해줘.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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