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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Apr 03. 2023

순백의 밤

배신에 이름표가 붙어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수치에는 주인이 정해져 있습니다

지독한 그 수치는 옴짝달싹 못하는 나에게 이름표를 붙여줍니다

배신만은 매일매일 나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어둑어둑해지는 산을 오릅니다

허벅지에 떨어지는 땀에도 철벅철벅 대는 카라비너에도

배신은 없습니다

땅을 박차는 걸음과 헐떡이는 수치뿐입니다


산 정상에서 소리라도 치면 잊힐까 했지만

산 정상까지는 너무도 많이 남았습니다

어떤 포기에는 이름이 있지만

나의 포기에는 수치만 있습니다


배신하는 것을 포기할까 수치스러움을 포기할까 고민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신 씨였나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성이 배 씨인 아버지는 등산하고 나서 먹는 묵밥을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수치가 나였다면 안심입니다


섬이 필요하면 내 방에 펼쳐놓은 텐트로 들어갑니다

화장실도 없고 화분도 없지만

배신과 수치와 눈물이 섞여 줄줄 흐릅니다

순백의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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