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한국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일본 작가가 있을까. 하루키의 신작은 늘 지대한 관심을 받았으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루키의 책을 완독 한 사람의 비율 역시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체는 읽기 쉽지만 내용이 난해하고 대화의 흐름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신작은 700쪽을 훌쩍 넘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이 책을 읽었으며, 책 장을 덮으며 하루키와 작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키의 정수를 담았다는 이 책은 그동안 하루키가 썼던 소설들의 자취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루키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 이 소설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하루키는 보스헤스를 빌어 '한 작가가 일생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6년여 만에 발매한 신작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써 왔던 제한된 모티프가 총망라 됐다. 바꿔 말하면 그동안 써왔던 책들의 테마가 반복된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참 힘겨웠다.
70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 책을 내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는 묵직한 한 방이 담겨있다. 주인공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특별할 것이 없고 그저 무언가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는 그의 말은 충격이었다. 무언가 이루고 남기기 위한 것이 인생이 아니다.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삶을 살았다. 목표나 이뤘던 성취를 즐기기보다 또 다른 성취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나 디지털의 세계에 남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그저 기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궁극적인 무엇은 찾지 못했다. 하루키도 무엇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루키도 기다리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그 고백이 참 위로가 됐다.
하루키는 또한 작가의 말에서 '진실이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소설 속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정지 돼 있다. 그래서 무한하다. 꿈과 상상 속에선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아주 짧은 시간으로 느끼지만 깨고 나면 아침이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기다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인터넷의 세계에 머물며 실체 없는 사진들을 보며 시궁창에 처박힌 자신의 현실을 자위하며 썩어버린 자아를 마주하기 싫어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 민폐가 범죄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
사랑은 단순하지 않다. 미움도 증오도 사랑일 수 있다. 하루키를 오랜 기간 존경해 왔으며 애정했다. 하지만 이제 그와 작별하려 한다. 읽기가 지겨워진 작가를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어쩌면 하루키와 작별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또 다른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간에서 지금을 담백하게 끌어안는 인간이 꽤나 되고 싶어졌다.
p.s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서는 성관계와 사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1부와 2부에 로맨스가 등장하지만 철저하게 성관계는 하지 않는다. 오직 키스까지 만 그려진다. 하루키답지 않다고 하기에는 결벽증적으로 그것을 배제한 하루키의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성관계와 사정이 자신의 시그니처가 아니라는 항변일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관심이 줄어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