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 포기당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생을 마감하면서, 일생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아마 나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날을 떠올릴 거다. 여전히 그날의 공기, 시간의 흐름 모든 것을 기억한다.
추어탕 냄새가 진동을 하는 날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고3 병이 제대로 걸린 나는 점심시간에 학생 식당가는 것조차 싫다며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엄마는 유난이라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시락을 싸줬다.
그날 아침은 나, 동생, 엄마 셋 모두가 유독 분주했다.
엄마는 도시락 메뉴인 추어탕을 파란색 일제 도시락에 담아서 던지듯 건네고는, 차 시동을 걸기 위해서 먼저 집을 나섰다.
오전 시간이 타임워프처럼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됐다.
반 아이들이 모두 식당을 향하고 적막이 흐르는 교실의 맨 뒷자리에서, 파란색 일제 보온 도시락 가방을 꺼냈다.
“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시락 통이 제대로 잠가져 있지 않아서 추어탕 국물이 아주 제대로 흘러넘쳤다.
보온 도시락 가방이 방수천이라서 망정이지 교실이 온통 추어탕 냄새로 물들 뻔했다.
고3병 말기 환자는 참지 않았다. 꺼진 채로 가방 구석에 있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아 제대로 안 잠그면 어떻게 하냐고!!!”
라고 시원하게 쏟아부을 준비를 하는데 통화연결음이 길어진다.
2번, 3번… 10번을 넘게 걸어도 연결음이 멈추지 않는다.
결국 통화를 하지 못했고 남은 추어탕 건더기로 겨우 점심을 해결했다.
그날따라 유독 부아가 치밀었던 나는 쉬는 시간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댔다.
응답은 없었다.
오후 시간은 또 쏜살 같이 지나갔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됐고, 야자가 의무였던 우리 학교는 복도마다 선생님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공부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이산화탄소 가득한 교실의 적막을 깨고 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동생이다.
“왜?”
“누나, 집에 삼촌이 와있는데 집에 일찍 좀 올 수 있냐는데?”
어림 반푼 어치도 없지.
친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함께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마치 엄마 탓이라는 듯 평생 엄마를 냉대하는 할머니 탓에, 나나 동생이나 친가 가족 모두에게 날이 서있었다.
물론 그 냉대에서 장손인 동생은 예외였지만. 하여튼, 누굴 보고 오라가라야. 참내.
“아니 안돼. 할 얘기 있으면 기다리라고 해.”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엄마랑 통화가 안돼서 찝찝함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가지가지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희애야, 막내 숙모야.”
“아… 네. 어쩐 일이세요?”
“오늘 엄마가 학교 끝나고 데리러 못 가실 거라서, 미리 전화했어. 집에 혼자 갈 수 있지?”
야간 자율 학습이 밤 11시 넘어서 끝나는 탓에 매일 밤 엄마가 데리러 오곤 했는데, 갑자기 못 온다니?
심지어 나랑은 통화도 안되면서 숙모한테 말을 전하고, 집에서는 삼촌까지 나를 기다린다고?
‘이상하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상황들이 이어졌지만, 대한민국 고3은 거짓말 같은 집중력을 발휘해서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삼촌이 오래오래 기다리다가 지쳐서 집에 가길 바라면서, 일부러 천천히 집으로 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걸었다.
“엄마가 좀 다쳤어.”
가방을 놓고 할머니 방으로 건너간 나와 동생에게 삼촌이 한 말은 현실성이 없다 못해 귀를 튕겨나갔다.
엄마가 운영 중인 제탕원의 과일 분쇄기에 엄마 손이 빨려 들어가서 큰 수술을 받았다는 것.
경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현재는 수술을 받고 무균실에서 회복 중이라서 통화가 어렵다는 것.
그 뒤로도 할머니한테 돈을 맡겨뒀다는 둥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는 둥 입 밖으로 나온 것들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물속에 있는 것 같이 먹먹했다.
TV 드라마는 다 거짓말이었다.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다들
“뭐라고오오오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던데, 그냥 멍했다.
눈만 껌뻑이게 됐다.
그리고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떠올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와 동생은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눈물도 안 났다.
그저 씻고, 내일 학교에 갈 가방을 챙기고 불을 껐다.
벽을 향해 누운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잠에 들었다.
수능을 일주일 남짓 남겨둔 저녁이었다.
포기는 나에게 또 한 발짝 가까이에 왔다.
그놈 참 눈치도 없다. 수능은 지나고 올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