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2. 포기하다
사실 은행에 취업하기 전에 한 번 큰 고배를 마신 적이 있다. 인턴까지 마친 은행에서 최종 관문에서 등을 돌린 거다. 인턴 중에서는 큰 규모의 발표도 여럿 하고 나름 열심히 생활한 덕에, 공채 면접장에서도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면접장 안에서는 일상 담소처럼 인턴 생활을 했던 지점의 지점장님 안부를 나누다가 왔다. 그래 놓고서는 최종에서 나를 떨어뜨리다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뼈저리게 경험한 순간이었다.
취준생에게는 눈물 흘리는 시간조차 사치다. 만 하루 동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다시 미어캣 모드로 돌입해서 목을 쭈욱 빼고 나를 받아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생겼다. 인턴이었지만 대기업이었다. 외가가 포항인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포스코였다. 정규 은행원으로 취업해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포스코 인턴 그다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인턴 손희애입니다.”
“몇 살이야?”
여러 차례 인턴과 신입사원 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선배가 되면 이 질문은 절대 먼저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질문이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왔다.
“26살입니다.”
“어휴! 나이가 꽤 많은 편이네! 인턴치고는 좀 늦은 거 아닌가?”
맞아도 아주 세게 맞았다. 인턴 출근 첫날부터 면전에 대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듯 ‘늦음’을 선고하는 꼴이라니. 결국 그날 오전 내내 모니터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계단실로 달려가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노였다. 내 눈물에는 종류가 있는데 슬퍼서 흘리는 눈물, 이건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주로 흘린다. 그리워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서울에 있는 딸 집에 사나흘씩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볼 때 그것을 흘린다. 반면에 분노의 눈물은 거의 씨가 말랐다. 특히 상대의 무례에 의한 눈물은 상대에게 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최대한 속으로 삭히려고 노력한다.
그날은 온전히 ‘분노의 눈물’이었다. 기분 탓인지 머리까지 차오른 분노만큼 눈물도 뜨거웠다. 식상할 수 있지만 동기부여를 북돋아주는 이들의 강연에서 하나같이 ‘늦은 것은 없다.’라고 외치지 않나. 특히나 취업 과정에서 고배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늦음’을 내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가는 강남대로 한복판에 발이 얼어붙을 것 같아, 절대로 스치는 생각으로도 머릿속에 담지 않는 단어였다. 늦긴 누가 늦어!
반면, 타인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의 힘은 꽤 강력하다. 나 스스로가 “나는 나약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더라도, 내면에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의지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내숭을 떨듯 일부러 나를 작게 표현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남의 입에서 “나약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기정 사실화가 돼 버린다. 나는 나약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거다. 다른 명사, 형용사나 부사 혹은 그 어떤 말도 다 마찬가지다. 특히 나이는 아주 자주 우리에게 걸림돌이 된다. 머리가 백발이 된 노인들에게는 얼굴 위로 주름이 진하게 자리 잡은 중년도 ‘한창인 나이’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의 나이를 그렇게 여기는 경우는 잘 없다. 심지어 20대 초반, 아직 사회로 나아가지도 않은 대학교 졸업반 학생들 입에서 “나 이미 늦은 것 같아.”라는 말들이 대수롭지 않게 나온다.
내가 그날 ‘늦었다.’라는 말을 듣던 사무실 내에는 나와 동갑인 정규직 사원도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늦은 건 맞다. 같은 26살에 누군가는 정규직 사원, 누군가는 체험형 인턴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분명히 같은 선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10년 후에도 그 ‘늦었다.’는 말은 동일하게 적용될까? 어쩌면 그 말에 자극받은 내가 밤낮없이 업무에 임해서 최연소 팀장 등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나는 포스코와는 전혀 방향성이 다른 은행과 공기업을 거쳐 현재의 N잡러가 돼서, 상상의 끝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나 분명 한 건 그날 그 분노의 눈물은 거기서 끝이었다. 혹시 가수 아이유 콘서트의 전설의 팬이 외친 “찌긴 뭐가 쪄!!!”를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늦긴 뭐가 늦어!!!”
콘서트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자취방에서 나 역시 한바탕 소리를 내지르고는 또 다른 자소서를 써 내려갔다. 작은 압정이 내 발을 찔러서 생채기를 낼 수는 있어도, 뼈를 상하게 하지는 못했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곧 ‘만 나이’가 기준 나이가 된다고 한다. 한국식 나이가 사라지는 거다. 누군가는 무슨 의미가 있냐고 너스레를 떨고 누군가는 어려지게 됐다고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후자다. 물리적 숫자가 적어진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어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늦음’에 대한 판단을 늦출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나이로 규정짓고, 늦었다며 도전을 포기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늦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내심 기쁘다. 혹여나 내가 늦었다고 생각 들면, 도심 외곽에 있는 경로당이나 노인정에 봉사활동을 가보는 걸 추천한다. 나이는 꿈을 꾸게 하는 요소도, 놓게 하는 요소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늦긴 뭐가 늦어, 흥칫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