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2. 포기하다
나의 커리어 설명에는 ‘7개 직장을 거친’이라는 문구가 적지 않게 들어간다. 그 ‘7개 직장’ 중 마지막 직장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공기업이었다. 요즘은 신의 직장 기준이 조금 바뀌었으려나. 라떼는 공기업, 공공기관 등등 ‘공’ 자가 들어가며 급여와 복지가 나쁘지 않은 기업들을 ‘신’들이 다니는 직장이라며 떠받드는 분위기였다. 우리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전 직장인 은행을 그만둔 지 6개월 만의 출근이었다. 난 워낙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아이라서 시시각각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이도 바뀌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성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행을 그만두고 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게 된 거다.
‘내가 뭐가 그리 대단한데?’
‘쥐 뿔도 없는 주제에.’
꿈이 밥 먹여주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지금까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 나의 발자국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한탄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물론 지금은 철회한 생각이다.) 방랑자 생활을 멈추고 이제는 정말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온전히 내 밥그릇을 챙겨야 할 때라는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고, 이내 선택한 것이 ‘공’ 자 들어간 직장이었다. ‘평범한 삶’의 전선에 뛰어들기로 한 거다. 평범한 직장에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서 평범하게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면서 평범한 내일을 꿈꾸는 그런 삶.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런 평범한 삶은 비현실적이고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지금도 잘 알고 있지만, 이때까지 나의 구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것 중 한 가지였다. 토로하자면 그전까지 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라 믿으며,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27살에 다시 신입사원이 됐다. 대기업에서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늦었다.’ 소리를 들었는데 신의 직장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소위 말하는 철밥통을 안고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청년이라는 테두리 안에 빼곡하게도 모였다. 청년의 정의는 ‘만 34세 이하’다. 여기서 27살에게 ‘늦었다.’ 소리를 했다가는 청년 인턴제도로 모인 청년들이 단체로 봉기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사실 그 결심은 3년은 채우지 못했다.
발령지는 포항이었다. 외가가 있는 포항이 나의 근무지라니! 1년에 1-2번 정도 들러서 회로 배를 잔뜩 채워서 돌아가던 도시에서, 이제는 돈벌이를 하고 출퇴근 버스를 타게 된 것이 한동안은 너무 어색해서 학기 중에 전학을 온 아이처럼 도시 자체와 데면데면했었다.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늑대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주인공 아이들이 일반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며 분노하거나 지나치게 기쁠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늑대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엄마가 ‘주문’을 알려주고 이를 되뇌라고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방어막 같은 용도의 주문이었다. 나 역시 공기업을 다니면서 3년 내내 되뇌었던 주문이 하나 있었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인턴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한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해당 공기업을 입사하려면 반드시 인턴생활을 거쳐서 이 과정에서 70% 정도만이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고, 나머지 30%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래서 2달 정도의 인턴 기간 동안은 매 분 매 초가 살얼음판으로 느껴졌고, 숨 쉬는 것 하나조차도 감시와 평가 아래에 있었다. ‘있는 것 같았다.’가 아니라 ‘있었다.’인 이유는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집은 어디예요?”
“서울입니다.”
“포항에는 가족이 있어요?”
“외가가 포항에 있어서, 엄마가 가끔 왔다 갔다 하십니다.”
해당 기업의 문제였는지 혹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지사의 문제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첫인사부터 네 편과 내편 학연과 지연으로 가득 채워진 질문들이 쏟아졌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단추가 잘 못 꿰어졌던 것 같다. 외가가 포항이면 ‘포항 사람’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대해서 ‘집은 서울’이라고 반박하는 나는 ‘서울 사람인 척하는 재수 없는 신입’이 돼버린 거다. 심지어는 농담인 척 왜 서울말을 쓰냐는 지적을 받았다면 믿을 수 있으려나. 특히 언론사에 대기업에 은행을 거치고 온 신입은 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 직장들을 거쳐서 왜 이곳에 왔는지, 그런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면 얼마나 일을 훌륭하게 소화해낼 것인지. 자그마한 지사 직원들의 모든 눈이 매 순간 나를 향해 있었고, 마치 시골 학교에 서울에서 갓 부임해서 내려온 선생님이 온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꼴이었다.
도마 위에 올라있는 생선은 움직임을 크게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직원이 돼서 ‘평범한 삶’에 정착하고 싶었던 나는 늘 주문을 되뇌었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다 들리도록 내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점심 뭐 드시겠어요?’ 물음표를 던져야만 했고, 내가 했던 일들을 일부러 축소시키는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야만 했다. 문서의 행간에 목숨을 걸고, 회의 시간에 다과 세팅을 얼마나 잘하느냐로 센스를 논하며, 입사 순으로 권력이 정해지는 곳에서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과 그 현장에서 배운 일들은 깡그리 지워야만 했다. 이따금씩 경력을 바탕으로 의견이라도 낼 기미가 보이면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소리를 들으며 건방진 신입 취급을 받았다. 이름표에 ‘자존심’이라고 적혀있는 코끼리는 합격을 위해서 자그마한 구슬 상자에 몸을 욱여넣어야만 했다. 인간 아이가 늑대로 변해서 사회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향할 수도, 물러날 곳도 없다고 단념을 한 때였다.
돌이켜보면 너무 간절한 것이 문제다. 취업 면장장에서도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앞서면 준비해 갔던 것 이상으로 오버 액션을 해서 면접관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거나, 머릿속의 생각들을 온전히 끄집어내지 못해서 불합격으로 기울었던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안 되더라도, 뭐.’처럼 마음을 한껏 비우고 간 면접장은 의외로 합격 카드를 받았다. 인턴 기간 2달 내내 정직원이 돼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지나치게 간절했던 나는 늘 저자세였다. 인턴이 저자세가 아니면 무얼 어찌하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저자세였다. 그런 저자세는 못된 심보를 가진 이들에게 빌미를 주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유리병에서 꺼내 주어도, 한 뼘 이상으로는 점프를 할 수 없는 벼룩이 됐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은 생겼는데, 밥이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