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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념있는 희애씨 Jul 04. 2022

서울 가고 싶어서 결혼했다며?

파트 2. 포기하다


역시 ‘신들이 다니는 직장’인가. 마지막 직장이었던 공기업에 다니는 동안 나는 결혼을 했다. 요즘 우리 2030을 N포 세대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포기 대상인 ‘결혼’을 했으니 신이 도운 거였나.


결혼을 한 유부남, 유부녀들에게 “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는다면 다들 뭐라고 답할까. 너무 사랑해서? 서로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 아니면 혹시 ‘인사이동’을 하고 싶어서?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신의 직장에서 나는 인사이동을 위해서 결혼을 하는 정신나간 결정을 한 사람으로 치부됐다.


“서울 지사 가고 싶어서 일부러 빨리 결혼하는 거라며?”


주말마다 서울로 향했다. 전 남친 현 남편을 비롯해서 가족 그리고 친구가 그곳에 있었고, 매주 금요일마다 점심시간 종 치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타 부서 지원으로 주말근무를 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마저도 꼬박꼬박 참여하지는 않았다. 주말도 없는 삶을 살고자 공기업에 취업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미 정직원이 된 순간부터는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행 인턴생활을 할 때 만난 전 남친 현 남편과 나는, 내가 공기업에 취업한 순간부터 이제는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았으니 결혼을 준비하자고 합을 맞췄다.


요즘 신문, TV 뉴스를 보면 다들 결혼을 안 해서, 아이를 낳지 않아서 문제라고 얘기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사실 결혼을 하지 않다는 대목에서는 소심하게 두 줄을 긋고 싶다. 웨딩 관련 업체를 가보면 북새통인 건 기본이고, 스튜디오 촬영이나 예물 제작 등을 위해서 예약을 잡으려면 기본 1-2달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니 기껏 잡아둔 주말 예약 일정에 따라서 꼬박꼬박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설사 아무 이유 없이 서울로 향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아무 이유’를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결혼식을 올린 시기는 인턴사원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시점으로부터 약 6개월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때부터였다. 누군가에게는 축하의 대상인 결혼이, 내게는 뒷담화의 씨앗이 된 것이. 곧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직원들끼리 눈빛으로 뭔가 주고받는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예민한 것이겠거니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회의실에 물건을 챙기러 들어갔다가, 대상은 빠져있지만 문장의 흐름상 그 대상이 누가 봐도 ‘나’라는 걸 알 수 있는 뒷담화를 듣게 됐다. “서울로 인사이동하려고 일부러 일찍 결혼하는 거라며?”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다른 얘기로 주제를 넘겼지만, 공기 중에는 뒷담화의 대상이 불편해하는 기색과 뒷담화를 들켰지만 미안한 기색은 없는 뻔뻔한 자들의 헛기침으로 가득 찼다.


당시에 내가 서울지사로 인사이동을 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예비남편이 포항으로 내려오면 되잖아?” 따위의 대가리 꽃밭인 소리를 해대는 직원도 있었지만, 뭐 그리 대단한 직장과 직업이라고 예비남편의 삶의 터전까지 바꾸라는 건지 썩소가 절로 나왔다. 남의 일이라고 상대방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배려 없는 사고의 흐름에 혀가 내둘러지며, 없는 정이 마이너스가 됐다. 내심 결혼한 후에는 혼자일 때보다 인사이동이 빠르게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있었다. 하지만 은행 지점처럼 전국에 있는 지사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워낙 서울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직원이 많은 터라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인사이동’ 따위가 결혼의 목적이 되다니, 그거야 말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나. 다들 그렇게 애사심이 넘치는 사람들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지인들은 하나 같이 나의 결혼 소식에 눈이 땡그래지며 놀랐다. ‘희애 너는 정말 늦게 할 줄 알았다’부터 급기야는 ‘임신했어?’라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리포터 생활을 시작으로 방송계에 발톱만큼이라도 몸을 담고, 방송기자를 바라보면서 길을 걸어왔으니 갑자기 생뚱맞게 웬 결혼이냐 했을 수 있다. 씁쓸하게도 방송계에서 ‘여자가 결혼하면 커리어는 끝’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도 그들의 반응에 한 몫하기도 했고. 나 역시 내가 최소 35살쯤 돼서야 결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은 타이밍이었다.


 몫을 하면서 돈벌이를  때쯤부터 ‘ 사람이구나싶은 괜찮은 사람이 나타났고, 지금 와서 보면 착각이었지만 평생을 안정적으로 서포트해줄 직장에 정착도 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무게감 대한 갈증이 있다는  나조차도, 결혼을 준비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가 혼자서 나와 동생을 키우며 겪었던 숱한 역경, 고생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했을  순간들을 내가 메워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내가  배는 이따금씩 균형 감각을 잃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대고는 했다. 그런 나의 배에 함께 무게를 실어줄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힘이 된다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알게  거다.


결론을 끄집어내자면, 나는 공기업을 다니면서 결혼을 매개로 서울지사로 인사이동을 받지 못했다.  손으로 사표를 내고 걸어 나왔다. 결혼식을 치르고도  1년을 채운 뒤였다. 꼬박 1년을 주말부부로 서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교통비 지원따위도 없이 길에 돈을 뿌려댔다. 그들의 그토록 대단한 직장은 주말마다 기차에 몸을 싣는 직원의 노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연차 순으로 혹은 연줄이 있는 순으로 인사가 이뤄질 뿐이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마음속에 남은  줄은 ‘그럴  알았다.’였다.


남의 상황을 판단하는 건 참 쉽다. 진실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저 내 생각이 닿는 대로 입을 놀리면 되니까. 하지만 그 무게감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의 그릇은 분명히 다르다. 그때 그 회의실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인사이동하려고 결혼을 하겠어요?”라고 되받아쳤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니, 오히려 또 험담의 소재를 던져주는 꼴이었을 거다. 그들의 그릇은 거기까지니까.


직장생활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너무 어려워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해서 퇴사를 한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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