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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Jan 12. 2022

#12 가시덤불숲 마녀(2)



숲은 깊고 복잡했다. 서로 얽힌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고 수백 년 동안 빛 한 번 쬐지 못한 바위 위로 이끼가 푸르렀다. 헤맨 지 얼마 안 돼 소녀의 치마꼬리는 가시덤불에 연거푸 걸려 헤졌다. 넘어진 몸뚱이 위론 흙먼지가 덮였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호기롭게 나섰기로소니, 열 한 살 난 어린애가 산길을 타면 얼마나 잘 탔겠는가. 마침내 마녀를 찾겠단 제 각오가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은 순간, 돌부리에 걸려 비탈을 굴렀다.     


눈을 떴을 땐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공터였다. 이마 위로 뜨뜻미지근한 것이 느껴졌다. 웬 마른 풀더미였다. 사람도 보였다. 거적떼기를 뒤집어쓴 채 앉은 그 이 앞 쉴새없이 김이 오르는 아궁이가 있었다.


“누워 있어. 이끼 떨어진다.”          


그 때였다. 거적 속에서 쇳소리나는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친 낭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기이할 만큼 팽팽한 볼과 진한 팔자주름, 희뿌레한 눈동자에 작고 뾰족한 코. 이목구비만으론 나이가 짐작되지 않았지만, 실털같은 백발이 거적 사이로 비져나와 있었다.     


“누구세요?”

“말해주면 알 성 싶으냐.”

“혹시-”     


낭아가 머뭇거렸다.     


“당신이 마녀인가요?”

“뭐?”     


노파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난 그 여자가 아니야.”

“그럼, 혹시 마녀를 아세요? 저와 닮은 남자를 여기서 본 적 있나요?”

“별 헛소리를 다 듣겠군.”     


그 말을 끝으로 노파는 입을 다물었다. 솥이 달궈지는 기괴한 증기음만이 공터에 차올랐다. 수백 년은 묵은 듯한 굽은 나무들과, 이제 막 자라 올랐으나 빛을 받지 못한 다복솔이 멋쩍은 듯 몸을 흔들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낭아는 새삼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런 증좌도 없이 숲을 탄 것도 모자라 목숨을 살려준 은인에게 마녀냐 물었으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으렷다. 무엇보다 노파가 어른들이 말하는 마녀인진 모르나, 낭아의 살껍질에 관심 있는 것 같지도 오라비를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돌아가야 해, 낭아는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설사 저 여자가 마녀래도, 날 도와줄 리 없잖아.


그 때 낭아의 눈에 노파가 깔고 앉은 가시덤불이 보였다. 짙푸르다 못해 검은 빛까지 도는 덤불은 밧줄처럼 얽혀 노파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굵직한 가시들이 거적떼기를 뚫고 노파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찔렀다. 불쌍하기도 하지. 피딱지를 본 낭아의 마음이 약해졌다. 소녀는 제 비단 망토를 벗었다. 엉덩이 밑에 깔아줄 요량이었다.      


노파 곁에 막 다가가던 찰나였다. 인기척을 느낀 노파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놀란 낭아는 망토를 놓쳤다. 뒷걸음질을 치다 덤불 위로 쓰러졌다.


“피가 났느냐?”          


몸을 일으킬 틈도 없이 노파가 물었다. 둘은 동시에 엉망으로 긁힌 낭아의 손등을 봤다. 꼭 세 방울, 세 방울의 피가 맺혀 있었다. 노파가 비명을 질렀다.          


“누가 그런 짓을 하라고 했어! 누가!”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흡사 도살당하는 가축의 울음이었다. 이제껏 저를 난자하던 가시덤불도 밟아댔으나, 밟힌 덤불은 생물처럼 꿈틀거리더니 그녀의 허벅다리를 다시 휘감았다. 분을 못 이긴 노파 제 손을 달궈진 솥 안에 밀어 넣었다. 고기가 익는 듯한, 느글거리는 누린내가 온 공터에 진동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마침내 조용해진 노파가 시뻘개진 눈을 하고 말했다. 지져진 손껍질이 번들거렸다.      


“도와주는 건 내 자유지만 받는 건 달라.”

“그게 무슨-”

“세 가지 소원을 말하거라. 꼭 세 가지를.”           


노파의 강파른 목소리가 말했다. 낭아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소녀는 그때껏 덤불 위로 엎어져 몸을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냄새와 핏줄 곤두선 노파의 눈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 가운데서도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것은, 과연 소녀의 재기일까, 우연일까.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돌아오게 해주세요.”          


노파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바로 안 돼.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래도 괜찮아요. 돌아와서, 다신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좋다.”     


노파가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쇳소리가 나는, 기괴한 웃음. 멍하니 넋을 놓고 보던 낭아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소녀의 등 뒤로 노파가 소리쳤다.           


언제든 오거라.

다음 소원이 생각나면,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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