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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Jun 13. 2018

딸부자집의 좌충우돌 사윗감 찾기

제인 오스틴 作, 『오만과 편견』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로맨스를, 누군가는 판타지를, 또 누군가는 누아르 장르를 좋아한다. 때로는 장르가 아니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나 장소 때문에 호불호가 결정되기도 하고, 작가나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가 그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나 훌륭하다고 손꼽히는 작품도 모두의 취향에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의 취향을 밝히자면, 로맨스는 별로다.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 스토리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진부한 설렘 요소들로 이야기를 전개시키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을 설득력 있고 세밀하게 표현해낸 경우이다. 독자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납득할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이입할 수 있을 때, 소설이든 영화든 몰입하여 감상하곤 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원작인 책은 물론 뮤지컬로까지 즐길 수 있었던 이유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과 함께  3大 로맨스 고전 소설로 꼽힌다. 영국에서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된 『오만과 편견』은 우리나라에서만 스무 가지에 달하는 번역본을 만나볼 수 있다. 섬세한 인물 묘사와 개연성 있는 전개를 기반으로 제인 오스틴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를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필력으로도 높이 평가된다. 특유의 문체 탓에 번역이 까다롭다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그 도입부로 특히나 유명하다.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그런 남자가 새로 이사를 오게 되면, 그 주위의 집안들은 이런 진리를 너무나도 확고하게 믿는 나머지 그가 어떤 심정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를 자기 집안 딸들 중 누군가가 차지하게 될 재산으로 여기곤 한다.

-『오만과 편견』, 고정아 옮김, 시공사


유명하다는 도입부를 읽었음에도 책에 대한 첫인상은 뭐랄까, 생각보다 미적지근했다. 삼류라고 말하지는 않겠다만, 흔하디 흔한 로맨스 소설로 여겨졌다. 대단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이어질 것이 뻔했고, 둘의 관계는 역시나 서로 간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첫인상을 지닌 채로 시작되었다. 그럼 그렇지, 로맨스 장르를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책은 이미 펼쳐졌고, 읽기 시작한 것이 아까워 끝이나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1부를 마쳤을 즈음엔, 다아시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껴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처음부터 매력 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둘은 매력적인 용모에 현명함과 적당한 선함까지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선하기만 한 제인이나 빙리와는 달랐고, 나머지 세 자매들처럼 철없지도 않고, 위컴이나 콜린스처럼 비호감도 아니다. 호감 가는 남녀 주인공은 로맨스 장르에서는 필수 요소이다. 이 요소가 지니는 부작용은, 반대로 로맨스 장르를 진부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을 진부하지 않다고 여기려면, 그 진부함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제인 오스틴의 문체는 그 특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 이야기만을 위해 달려가는 것 같으면서도, 수많은 주변 인물들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듯, 합리적인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각자의 색깔을 입는다. 흔히들 말하는 ‘캐붕(캐릭터 붕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인물들이 마냥 평면적이지도 않다. 모두 한 배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의 베넷 자매와, 그들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모든 인물들이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들을 통한 속도감 있는 전개는 또 어떠한가.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과정은 결코 성급하지 않다. 서로 모욕이나 다름없는 언사를 주고받으며 거절한 청혼이 결혼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감정 변화를 작가는 개연성 있게 풀어 나간다. 특히 리디아가 위컴과 도망가면서 두 인물의 심리적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고, 일종의 죄책감을 공유하게 된다. 독자로서는 아픔과 비밀을 공유하는 둘의 모습을 보면서 청혼을 거절했던 것을 번복하는 엘리자베스의 결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제인 오스틴은 영국 소설계의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작가의 소설이 언제나 환영받아온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평화로운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연애 소설이 역사의식과 사회 인식을 결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던 시기도 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본인의 진가를 다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묘하게 비꼬는 의미를 담아내는 문체는 작가를 브론테 자매와 함께 로맨스 고전 소설계의 거장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오만과 편견』인 이유에 대해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고, 두 인물 모두 오만과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는데, 필자야말로 이 소설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랑 이야기는 취향에 맞지 않다는 오만과 로맨스 장르는 언제나 클리셰 범벅이라는 편견. 결말에 다다라서 오만과 편견이 사라진 것은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뿐만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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