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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Jun 11. 2018

<데미안> 후기

헤르만 헤세 作

그곳에서는 두 개의 세계가 착잡히 교차했으며, 양극에서 낮이 오고 또 밤이 왔다.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어머니의 애장서 중 한 권이었다. 집에 있는 책들을 들춰보다가, 이 책에 책갈피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머니의 흔적임을 확신했다. 55년간의 그녀의 흔적을 쫓고 싶은 마음에 올해 초 필사를 시작했다. 얼마 안가 손목에 부상을 입어 회복된 후에 이어서 하자는 생각으로 읽기를 미뤄두고 있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고전의 매력을 새삼 다시 느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이 『데미안』이었다. 결국 필사를 위해 남겨둔 나머지 부분들을 눈으로라도 담아내기로 했다.


원래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편이다. 문장 단위로, 단어 단위로 표현을 곱씹으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의 언어를 담은 것보다, 현학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많이 담은 책을 읽을 때 그 성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데미안』이 그러했다. 흰 종이 위에 까맣게 수놓인 글씨들은 수도 없이 머릿속 어딘가를 자극했고, 어느 순간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가만히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위로 상(相)들이 너울거렸다. 읽는 내내 가슴 떨리는 책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가슴 뛰게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크로머와 악마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의 오솔길을 걸어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길이 나에게는 너무도 미끄러웠던 것이다. 다정스러운 손이 나를 붙들어 구원해준 지금 나는 더는 한눈파는 일 없이 어머니의 품 안으로. 경건하고 온화했던 어린 시절의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순종적이고, 더 아이답게 행동했다. 크로머에의 예속을 나는 새로운 예속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서는 걸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목적인 마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옛적의 사랑스러웠던 '밝은 세계'의 예속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유일한 세계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데미안을 의지하고 그에게 나를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당시 나에게 그의 이상스러운 사상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두려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데미안은 나에게 부모님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했을 것이고, 채찍질과 경고, 조롱과 풍자로 나를 보다 더 자주적이 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아, 오늘에서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는 길을 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청소년기에서 20대 초반까지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교양 과목으로 수강한 심리학 강의에서 배운 것이니 꽤나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20대 초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에 있는 필자에게 저 문장은, 특히 저 문장 끝의 느낌표는 가슴속으로 날아와 그대로 꽂혀 버렸다. 싱클레어의 이야기는 10대 초반에서부터 시작된다.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하였는가. 필자 또한 불완전한 본인에 대한 불안감으로 어떠한 사회에 속하려고, 사회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현재에는 얼마나 자주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어린 시절보다 나은 모습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가? 지금 또한 '밝은 세계'로의 예속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꽤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은 넓어졌고, 그와 함께 필자의 세상 또한 확장되었다. 지금에 와서 느끼게 된 것은, 모든 결정과 행동들은 주체적으로 이루었을지언정, 바탕이 되는 가치관 자체는 부모님에게 예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필자에게 '밝은 세계'는 가족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생활을 지배하던 차에 『데미안』을 마주하였기에 가슴속을 더욱 격렬하게 울렸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유년 시절의 종말을 고해준 감정과 환상들은 이야기할 만큼의 충분한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어두운 세계', 그 '다른 세계'가 다시 나타났다는 데 있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나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었다. 그럼으로 해서 또한 그 '다른 세계'가 외부에서부터 나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얻었던 것이다.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일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람은 기억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https://blog.naver.com/jiwun72/220757754690) 여기서의 기억은 경험을 의미한다. 경험은 그것의 크기와 무게와 상관없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간에게 남는다. 싱클레어에게 프란츠 크로머와의 일은 '어두운 세계'로서 그의 안에 자리 잡았다. 그 경험의 크기와 무게는 꽤나 지대하여, 싱클레어 안의 '어두운 세계' 또한 그 자신에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첫 장인 '두 개의 세계'부터 줄곧 마음 한 구석이 붕 뜬 듯한 기분으로 읽어내렸지만, 제4장인 '베아트리체'부터는 호흡이 가빠올 정도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그 안에서 데미안을 찾은 그 순간부터, 필자는 제정신으로 책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약에 취한 기분으로 글씨를 담아내었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눈앞에 잔영들이 수없이 넘실거렸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소음들이 울리고, 가슴속이 답답해졌다가 허해지기를 반복할수록 호흡은 더욱 가빠졌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단지 그가 소년의 용모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어른의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을 내가 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어른의 얼굴이라는 것 말고도 다른 어떤 것을 보거나 느꼈다고 확신했다. 마치 여자의 얼굴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히 그 얼굴은 잠시 나에게는 어른 같거나 혹은 아이 같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천 년이나 나이를 먹은 것도 같고 어쩌면 시간을 초월한 것도 같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낙인이 찍혀 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짐승들이나 나무들 혹은 별들이 그렇게 보일는지 모른다. 지금 내가 어른으로서 그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그때에는 알지도 못했고, 또 정확히 느끼지도 못했지만, 무엇인가 그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를 싫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나는 그저 그가 우리와는 다르고 마치 짐승이나 유령 아니면 어떤 환영과도 같았다고 느낄 뿐이다. 그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우리 모두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딴판이었다.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이것조차도 일부분은 그 후의 인상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베아트리체를 마주한 이후, 싱클레어는 그림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상념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중 싱클레어의 삶을 본격적으로 뒤흔들기 시작한 그림은 단연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 그림이다. 베아트리체를 그리던 때처럼 자신의 상념이 완벽히 담길 때까지 수없이 새로 그리기를 반복하여 완성해낸 그림은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예지이기도 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후에 싱클레어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만나게 된 피스토리우스에게서, 어쩌면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을지 모르는 일종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둘은 아프락사스에 관해 매일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려낸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또 다른 '데미안'으로 다가오는데, 결과적으로는 데미안과는 다른 의미로 남는다. 데미안은 이상 혹은 아프락사스에 가까운 인간상이라면, 피스토리우스는 한 때의 싱클레어처럼 이상을 선망하는 데 그칠 뿐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는 것을 외면하려는 피스토리우스의 모습은 싱클레어에게 일종의 교훈으로 남기도 한다.


희열과 공포, 남성과 여성의 혼합, 성스러운 것과 몸서리쳐지는 것과의 뒤엉킴, 다감한 천진성을 뚫고 경련하며 지나가는 깊은 죄악. 내 사랑의 꿈의 영상을 이러했다. 그리고 아프락사스도 역시 그러했다. 사랑은 더는 내가 처음에 불안스레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가 베아트리체의 초상에게 바쳤던 것처럼 경건하고 정신화된 숭배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양쪽 다였다. 양쪽 다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천사의 모습인 동시에 악마였고,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된 것이며, 인간과 동물, 최고의 선이자 극단의 악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겐 정해진 일로 생각되었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숙명인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동경을 품고, 그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꿈꾸고 그것에서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실재하고 있어서 항상 나의 머리 위에 있었다.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공간 안에 살고 있고, 모두가 세상이라는 알 속에서 새로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알을 깨고 신, 즉 아프락사스를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싱클레어에게는 고독 안에서 본인의 세상, 즉 알을 마주하고 그 알을 깨고 날아오를 일만이 남는다. 그 알 밖에 또 다른 알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알을 깨지 않고는 절대 아프락사스에 가까워질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불현듯 날카로운 불꽃 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사명'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고 해석하고 그리고 임의로 관리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는 것.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었다. 이 세계의 그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단 한 가지 - 자신을 찾고 자기의 내부에서 확고부동하게 되고 그것이 어디로 통하고 있든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생각이 나를 깊이 흔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던 것이다. 때로 나는 미래의 상(像)들과 더불어 희희낙락했다. 나는 시인, 혹은 예언자, 혹은 화가, 혹은 그 어떠한 것으로서 나에게 주어졌을 역할에 대하여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하여, 설교를 하기 위하려,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지는 않았다. 나와 그 밖의 어떤 사람들도 그거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부차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진정한 사명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 단 한 가지뿐이다. 그가 설사 시인이나 미치광이나 예언자나 또는 범죄자로서 끝나도 상관없다. 그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결국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을 자기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반쪽이고, 도피하려는 노력이며, 대중의 이상 속으로의 재도피이며, 순응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무섭고 성스럽게 그 새로운 심상이 내 앞에 솟아올랐다. 몇백 번이나 예감되고, 아마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적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비로소 그것은 경험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의 투척이다. 알지 못하는 것으로의, 아마도 새로운 것으로의, 아마도 허무로의 투척일 것이다. 이 투척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케 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그리고 그것을 송두리째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데미안』, 문예출판사, 구기성 옮김


유난히 인용이 많은 후기임을 작성하면서 느끼고 있는데, 『데미안』의 언어를 필자의 언어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책 속의 문장들이 남긴 인상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그저 사람들이 직접 읽고 본인들의 가슴속에 직접 새기기를 바랄 뿐이다.


싱클레어가 운명처럼 다시 데미안과 만나고 베아트리체, 즉 에바부인을 마주한 이후로는 싱클레어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과 의식의 흐름이 필자 이해 범위 밖에 있음을 느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살아가면서 싱클레어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에 가까워지는, 아프락사스에 가까워지는, 일종의 이상에 가까워지는, 인간으로서 감히 체험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까워지는 그 경험을,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체험해 볼 수 있을까.


결말이 남기는 인상은 굉장히 강렬하다. 공공장소에서 결말 부분을 읽게 되었는데, 감정의 소용돌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그 순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지하철 안인지라 내적 비명을 지르는 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소리 없는 아우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알 속에서 살아가는 새이다. 한 마리의 새로서 필자 또한 본인을 둘러싸는 알, 즉 세상을 깨닫고 그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체험을 하고 싶다. 필자의 데미안은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의 제목이 '데미안'인 이유, 독자들에게 이 책이 데미안일 수 있기 때문일까. 아프락사스에 닿을 수 있는 그 순간까지, 필자는 끝없이 데미안을 좇을 것이고, 날아오르기 위한 날갯짓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을 통해 모두가 알 속에 살고 있는 새임을, 그 알을 깨야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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