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후기
요즘에는 확실히 대중의 취향이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맥락 없이 나타난 백마 탄 왕자에 사람들은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키다리 아저씨는? 현대판 백마 탄 왕자나 다름없다는 인상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제루샤 애봇이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을 기반으로 꿈을 펼쳐 나가고, 그 후원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와 백마 탄 왕자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제루샤는 여타 신데렐라 유형의 주인공들과 달리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다. 제목과는 달리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 제르비스가 아닌 제루샤이다.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가 주로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루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과 나이답지 않게 똑부러지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고, 제르비스가 꾸준히 받아보는 제루샤의 편지에는 그녀의 재치 있는 필력까지 더해져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가 절로 지어지게 만든다.
극에서도 서간체를 그대로 유지한 점이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진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베르테르>는 서간체를 버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대본의 형식을 취한 데 반해,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제루샤의 편지를 두 배우가 번갈아 읽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두 주인공 외에도 꽤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2인극으로 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진 웹스터가 직접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 뮤지컬에서까지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인다.
소극장에서 이루어지는 2인극인 만큼 무대 연출은 꽤나 소박하다. 소품들은 배우들이 연기를 하며 직접 옮겨야 하고, 배우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경우도 드물다. 작은 무대 위의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공간은 경계가 마냥 명확하지만은 않아서 관객에게 많은 상상력을 요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은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둘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제루샤의 편지를 한 문장 한 문장 주고받는 모습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편지의 내용에 대한 두 인물의 리액션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 눈과 귀가 모두 즐겁다.
두 인물의 대사는 물론 넘버 가사까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무대 위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와중에, 번역이 아쉬움을 남긴다. 영어 가사로 접했을 때 느껴지던 흥겨움이 번역의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첫 넘버인 ‘The Oldest Orphan in the John Grier Home’부터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운율이 사라진 것으로 모자라 음절 수까지 맞지 않고, 원어와 달리 자꾸만 반복되는 특정 가사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한계이긴 하나, 지금의 번역이 정말 최선인가 싶다.
그 와중에 원어보다 번역된 가사가 더 좋은 넘버도 있었다. '행복의 비밀(The Secret of Happiness)' 만큼은 영어보다 한국어가 훨씬 좋았다. 영어로는 "I discovered"로 부르는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행복이란"으로 번역되었다. 원어 음원을 들을 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넘버인데, 한국어로 들으니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행복의 비밀’이 유난히 사랑받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음원상으로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현장에서 무대를 보고 반한 넘버가 있다면 ‘나의 맨하탄(My Manhattan)’이다. 제루샤에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려는 제르비스와 맨하탄에 홀딱 반해 들뜬 제루샤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실 번역이 아쉬웠다고 하나, 흠을 굳이 찾자면 그러하다는 것이지 전반적으로 극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대사와 표정을 맛깔나게 표현해내는 배우들 덕에 관객들이 극에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영어권과는 다른 한국식 유머도 녹아들어가 있어 번역된 극본만의 매력도 분명히 존재했다.
「키다리 아저씨」를 통해 진 웹스터는 여성의 참정권을 비롯한 당시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 당시의 페미니즘과는 양상이 달라 보일지 모르나, 그 근간은 동일하다. 고아원 후원에 관한 관심과 복지에 대한 인식까지 개선시킨 작품이라 하니, 소설을 통한 진 웹스터의 사회적 영향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작곡과 무대 연출까지 더해진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다시금 감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대단한 의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행복의 비밀을 엿보러 가도 좋다.
※2017년 <키다리아저씨> 관람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