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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Apr 11. 2019

뮤지컬계의 전설까지 도전하는 아서왕

뮤지컬 <킹아더> 후기

창작과 라이선스를 불문하고 뮤지컬이 우리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정말 독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땅끝 나라의 신화와 같은 전설을 동쪽 땅끝 나라에서 무대 위에 올렸으니 말이다. 심지어 한 편은 라이선스, 한 편은 창작으로 두 편이나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라이선스 뮤지컬인 <킹아더>도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화려한 연출과 안무로 무대를 장악하는 프랑스 특유의 스타일로 구현된 <아더왕의 전설(La Légende du Roi Arthur)>은 그 실황 영상이 영화로 개봉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우리나라에서의 흥행 성적은 부진하다. 아서왕이라는 소재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릴 때 동화책으로나 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막 오프닝 ‘서막’


물론 켈트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성낼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일반 대중에 속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아서왕 이야기를 성인이 되어서까지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반지의 제왕』이나 여타 장르 소설들처럼 특정 신화를 바탕으로 탄탄한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한 이야기가 아닌 이상 옛 전설이 성인 독자의 입맛에 맞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뮤지컬 <킹아더>도 시나리오가 유치하다는 평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에서도 평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목이 <아더왕의 전설>인 것에 비해 아서왕의 영웅성이 돋보이지 않는 극본에 대한 아쉬움을 작곡과 연출 및 무대예술, 퍼포먼스가 상쇄했다. 전문 무용수들을 따로 캐스팅하기에 가능한 화려한 군무와 관중을 압도할 정도로 큰 스케일의 무대 장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게 아니어도 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왜 실황 영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2막 엔딩 아더의 ‘다른 사람 곁에서’ (마지막 연설)


우리나라에서는 알앤디웍스(R&Dworks)가 발 빠르게 이 뮤지컬을 <킹아더>라는 이름으로 들여왔다. 그동안 알앤디웍스가 제작해온 콘서트처럼 즐길 수 있는 뮤지컬들을 생각하면, 아서왕 이야기가 비교적 무거운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킹아더>는 KBS에서 금요일에 진행되는 모 음악방송이 별칭으로 붙었을 만큼 팝 성격이 두드러지는 뮤지컬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가 태어나서 본 뮤지컬 중 가장 팝 성격이 강하다.


넘버들은 켈틱 팝이라고 한다. 켈틱 음악을 가미한 팝송을 말하는 것일 텐데, 불어 음원을 몇 곡 들어보면 켈틱 음악을 단 한 곡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그 의미를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팝송은 문화적 색채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경선이 모호하다. <킹아더>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팝 작곡에 켈틱 음악을 통해 이국적인 느낌을 더한다. 켈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 사극에서의 국악이 그러하듯이 켈틱 요소가 일종의 시간 여행을 시켜주지 않을까 싶다.


모르간과 랜슬롯의 '맹세해'


생소할 수 있는 켈틱 음악에도 불구하고 <킹아더>가 뮤지컬계 음악방송이 되어버린 이유는 작곡 방식에 때문이다. 여타 뮤지컬들과 다르게 <킹아더>는 넘버들이 서사를 담아낸다는 느낌이 없다. 사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려 노력한 것이고, 음악 지식이 하나도 없는 관객으로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크박스 뮤지컬 보는 기분이다. 대부분의 주크박스 뮤지컬은 팝 느낌을 최대한 지우기 위해 편곡을 하는데, <킹아더>는 거꾸로 넘버들이 팝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작곡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신선하다. 넘버를 들으면서 가사에 주의를 깊게 기울이거나, 레프리제 되는 테마를 찾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그냥 즐기면 된다. 심지어 전부 흥겹고 중독성이 강한 넘버들로 이루어져 리듬을 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아이돌 가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스타일의 안무가 더해져 공연은 콘서트를 넘어서 음악방송처럼 느껴진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작곡은 평소에 팝 뮤지컬을 즐기지 않는 필자도 하루 종일 들으며 지낼 정도로 좋다.


랜슬롯의 '깨어나'


뮤지컬은 작곡이 좋으면 절반은 성공한다는데, 왜 <킹아더>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아쉬움을 표할까. 누군가는 극본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구전되어 오던 전설 속 영웅 서사 특성상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서왕의 업적보다는 인물들의 관계성 위주로 각색된 것이 마음에 안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 극본은 제 역할을 다했다.


뮤지컬은 절대 극본 하나 좋다고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극본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은 작곡과 연출이다. 특히 <킹아더>처럼 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을 다룬다면 연출의 중요성은 높아진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에 비해 연출이 빈약해진 <킹아더>는 CG가 엉망인 판타지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뒤의 원형 구조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소품 사용은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나 싶을 정도로 검소하다. 오죽하면 160분짜리 영상회라는 말까지 나왔다. 관객들이 웃음이 터진다고들 하는 것도 연출 탓이 크다.


2막 오프닝 모르간의 ‘잘자, 모르간’ (드림캐처 씬)


알앤디웍스는 주로 중소극장 뮤지컬을 제작하긴 하지만, 대극장 뮤지컬을 제작해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없다. 올해에도 반가운 소식을 들고 온 <록키호러쇼>는 오히려 그 규모를 대극장으로 잘 키워낸 경우다. 그동안 제작해온 중소극장 뮤지컬들도 극본의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연출만큼은 센스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킹아더>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남는 이유다. 다시 무대에 올릴 때에는 초연에서의 아쉬운 부분을 채워서 눈요기까지 풍부한 작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뮤지컬 <킹아더>는 전례 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흥행 여부에 상관없이 도전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한 작품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아 들었으니, 이제 앞을 가로막는 운명과 맞서 싸워 영웅이 될 일만 남았다. 작품에 대한 호평과 혹평 모두를 발판 삼아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재연되는 <킹아더>는 브리튼을 넘어 뮤지컬계의 전설까지 써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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