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철가방 추적 작전> 후기
정훈이 학교에 결석했다. 다연이 관리하던 졸업 앨범비가 사라지자 학생들은 정훈을 의심했고, 담임교사인 순자(봉샘)도 정훈에게 책임을 물었다. 순자는 정훈의 행방을 찾기 위해 ‘철가방’ 일을 하는 철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정훈과 친한 희찬에게도 물어보지만 큰 소득은 없다.
연극 <철가방 추적 작전>은 학교를 벗어나 어린 나이에 생계 전선에 뛰어든 아이들의 발길을 학교로 되돌리기 위해 어른들이 ‘철가방’을 뒤쫓는 이야기다. 배경이 되는 수서동에 들어선 공공임대 아파트에 대한 민간 아파트 주민들의 차별은 중학교 안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위계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가난한 여건에서 성장하는 ‘영구’들에게 폭력을 가하고도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민간 아파트 아이들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장려하는 교사들도 입장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임대 아파트 통학로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며, 민간 아파트 아이들이 임대 아파트 아이들을 ‘영구’라는 차별적 호칭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알면서도 방치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평생 최저 임금 근처만 뱅뱅 돌지 말고 대학 진학을 통해 극복하라고 격려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 능력에 따라 계층화된 위계질서는 고착화된다.
희찬의 담임교사 재철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희찬을 '영구'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동호의 잘못은 눈감아 주면서, 놀림에 화가 나서 동호를 때린 희찬은 징계 위원회에 가차 없이 넘긴다. 이에 대해 순자가 학생들을 대놓고 차별하지 말라며 비난하자, 재철은 정훈이가 도둑으로 의심받을 때 동조하지 않았냐며 순자의 잘못을 지적한다. 물론 그 누구도 정훈과 희찬을 비롯한 임대 아파트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는 순자와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재철을 동일선상에 놓지는 않을 테지만, 순자도 결코 학생 차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연은 졸업 앨범비를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발견하고도 범인으로 몰린 정훈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는다. 전 남자친구였던 정훈에게 본인이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이기 싫다는 이유에서다. 정훈과의 연애 당시 경제적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알바하느라 바쁜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등,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는다. 성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선생님 앞에서만 성실한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하는 모습은 다연이 이기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좋은 어른 하나 없는 환경에서 아이만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이기적인 발상이 없지 않겠는가.
정훈은 등교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가출까지 한 상태다. 미술에 열의를 보이는 아들에게 최소한의 존중도 표하지 않는 아버지의 태도에 집을 나와버린 정훈은 답십리에서 벽화를 그리는 알바를 한다. 답십리 또한 수서동과 마찬가지로 주민들 간의 차별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고, 민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벽화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웃들 간의 화합을 추구하는 민지도 치기 어린 행동을 보이는 희찬에게 불량 학생이라는 낙인을 찍고, 벽화 훼손에 대해 결백을 주장하는 희찬을 믿지 않는다.
정훈의 진로 상담을 해주었던 미술 교사 윤우와 순자는 정훈을 찾기 위해 집에 방문하여 정훈의 아버지를 마주한다. 문밖의 상자에 미술 도구와 정훈이 그림 그림들이 망가진 채로 담겨 있는 것을 본 윤우는, 정훈의 아버지에게 혹시 아들에게 안 좋은 말씀을 하신 게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정훈의 아버지는 본인도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답한다. 기초 생활비를 계속 받으면서 현재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수입이 일정 수준을 넘겨서는 안 됐고, 정훈이 바라는 예고 진학과 순자가 강조하는 대학 진학은 정훈의 아버지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였다.
벽화 알바로 번 돈으로 정훈은 고시원부터 구하라는 철구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욕심대로 아이패드를 사버린다. 애초에 정훈이 교내에서 물건이 사라질 때마다 도둑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건 아이패드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정훈은 급우의 아이패드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데, 해당 아이패드를 빌렸다가 하루 만에 돌려주었음에도 정훈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철구의 소개로 시작한 ‘철가방’ 일은 고되고 스쿠터를 타다가 운전 미숙으로 다치기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학교에 나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철가방 추적 작전>은 하이퍼리얼리즘 수준으로 현 사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계급은 사라졌지만 수저의 색깔로 이루어진 계층 사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낙인을 찍어버렸고,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물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범죄자라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잘못된 차별임을 알면서도 어른들은 차별을 없애주기는커녕 아이들에게 루저가 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자연스레 차별과 폭력은 재생산된다. 어른들의 혐오 표현은 아이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버렸고, 부당한 사회를 물려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에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재철, 순자, 민지에 비해 젊은 윤우는 다른 어른들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임대 아파트 아이들에게 좋은 알바 자리를 정리한 엑셀 파일을 공유하고, 예고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충분히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등 임대 아파트 아이들에 대해 훨씬 낙천적이고 열린 자세를 보인다. 현실에 윤우와 같은 선생님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극을 통해 직시하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마주한 동아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정훈은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순자도 ‘철가방’을 드는 정훈의 선택을 존중한다. 순자에게서 볼 수 있는 ‘철가방’에 대한 인식 변화는 어쩌면 더 나은 사회로의 첫걸음이다. 대학에 가지 않고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회를 벗어나, ‘철가방’ 들고 최저 임금 근처만 뱅뱅 돌아도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아파트가 계급이 되지 않는 사회로 가는 길 말이다. 그곳에서는 임대 아파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고,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이웃을 폄하할 필요도 없다.
관객들은 순자와 임대 아파트 아이들의 편에서 극을 관람하게 된다. 그럼 나머지 인물들은 악역인 걸까? 그렇지 않다. 이 극에는 선역도 악역도 없다. 극이 다루는 사회 문제 안에서 그 누구도 가해자가 되지 못한다. 모두가 피해자다. 현 사회 구조는 인간들을 아파트의 노예로 만들었다. 연극 <철가방 추적 작전>은 우리에게 노예 문서를 확인시켜 주었다. 문서를 태울 불씨를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