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 후기
이제는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는 날이 없다.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아도 스마트폰 화면 속 자판이라도 마주하게 되어 있다. 기계식 키보드, 무선 키보드, 아날로그 타자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유튜브에서 ‘키보드’를 검색하면 ‘asmr'이 자동 완성될 정도로 이제 타자기는 기본 소음의 반열에 들어섰다.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타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발명되었다면? 동화 속 이야기 같겠지만, 해당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이탈리아 발명가 펠레그리노 투리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었다. 극은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 마나롤라를 배경으로 투리의 옆집에 캐롤리나가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홀로 삶을 영위하던 투리는 자꾸만 소음을 발생시켜 자신을 방해하는 캐롤리나가 반갑지 않다. 그에 반해 도미니코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가 반갑기만 하다. 작가 지망생인 캐롤리나는 유명 작가 도미니코와 동네 레스토랑에서 매주 문학 모임을 가지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소음을 줄여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과 특유의 밝은 에너지에 투리는 캐롤리나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캐롤리나와 친해지고 싶지만, 사교성이 따라주지 않아 도움을 주거나 선물을 하면서도 말투는 언제나 퉁명스럽다. 자신과 다르게 캐롤리나와의 친분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도미니코가 부러워 질투 어린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캐롤리나를 두고 귀엽게 다투고 함께 소풍을 가는 등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셋은 자각도 없이 서서히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캐롤리나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작가를 꿈꾸는 캐롤리나에게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투리와 도미니코가 합심하여 앞을 볼 수 없는 캐롤리나가 글을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끝에, 맹인들을 위한 타자기 ‘너를 위한 글자’가 탄생한다. 영국 왕립 발명 협회의 초청으로 런던으로 떠난 투리가 캐롤리나의 책을 선물 받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되며 장애를 딛고 꿈을 이룬 캐롤리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힐링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다른 작품들과 구분 짓고 싶을 정도로 <너를 위한 글자>는 따뜻하다. 부당한 사회나 악역을 통해 갈등을 빚어내지 않으며, 오로지 세 인물의 우정과 사랑, 이해와 공감이 관객을 울고 웃게 한다. 절벽 위로 집들이 알록달록하게 자리 잡은 마나롤라를 무대 위로 구현하여 앙상블의 화려한 군무 없이도 관객들은 눈이 즐거운 것은 물론, 평화로운 마을을 연상시키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에 귀까지 즐겁다. 투리의 집에 진열된 발명가다운 소품들 등 연출에 있어 작은 부분들까지 신경 쓴 게 느껴진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세 인물을 통해 꿈과 희망을 전한다. 캐롤리나는 투리와 도미니코의 도움으로 꿈을 이루고, 도미니코는 캐롤리나 덕분에 좋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투리는 캐롤리나를 위해 실용적인 발명품을 만든다. 꿈을 좇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는 치유를,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작품이다. 지난 9월 1일 막을 내린 이 극을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