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록키호러쇼> 후기
한 쌍의 남녀가 굉장히 뻔한 수순을 거치며 약혼을 한다. 여자는 부케를 받고, 남자는 반지를 건넨다. 이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면에서조차도 뮤지컬 <록키호러쇼>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웃음이 터진다. 어떤 면에서 보면 진부한 장면과 이질적인 장면들을 붙여놨음에도 어색하지 않고, 개연성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을 만큼 유쾌하다. 요즘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을 자주 찾는 관객들은 뮤지컬 <록키호러쇼>에 중독되었다.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약혼을 한 두 남녀가 사정이 생겨 전화를 빌리기 위해 방문한 성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 성 안에는 현대인이 봐도 평범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든 독특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성주는 사람도 아닌 외계인이다. 트랜실베니아 은하계의 트랜스섹슈얼 행성이라는 출신만으로도 우리는 성주 프랑큰 퍼터가 성소수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종일관 야한 차림을 하고서는 관능적으로 행동한다.
야한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은 프랑큰 퍼터 뿐만이 아니다. 그나마 평범하게 옷을 걸치고 있던 자넷과 브래드마저 나중에는 속옷 차림이 된다. 재미있는 점은 19금 뮤지컬임에도 무대 위 배우들의 의상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고 마냥 웃기다는 것이다. 의외인 지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실에서 마주한다면 손가락질할 일들도 뮤지컬 <록키호러쇼>에서는 허용된다. 극을 보는 순간 만큼은 모두가 이상하리만치 관대해진다. 아무도 약혼자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고 슬퍼하는 브래드를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찌질하게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폭소를 하고 빵을 던진다.
이는 제작 단계에서 일부러 극의 개연성을 깼기에 가능한 일이다.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깊게 이입하여 보는 극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장면 하나하나를 즐기는 극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개연성이 꽝인 극이냐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개연성을 무너뜨려야 할 부분과 유지해야 할 부분 사이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극을 관람하는 동안에는 개연성을 따지지 않게 된다. 극장을 빠져 나와서 줄거리를 곱씹어 보고 나서야 내가 말도 안 되는 극을 보고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흥분된 채로 배우들과 함께 몸을 흔든 그 순간을 잊지 못해 다시 극장을 찾게 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관객들이 개연성을 고려하지 않고 극을 재미있게 즐기게 만드는 것도 제작진의 목적이었을 수 있으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숨어있는 다른 의도도 금방 읽어낼 수 있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과 세상 어디를 가도 마주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은 기묘한 장면을 함께 나열해 놨음에도 관객들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개연성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결과로 관객들은 편견을 갖고 바라볼만한 상황들을 평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 된다. 윤리적 비난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도 있지만,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계급 제도가 윤리적으로 용인되던 사회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윤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세세한 부분은 변화를 겪겠지만 천부인권과 같은 큰 틀은 절대적일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그러기에는 그 윤리관이 포용해야 하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세상 일이 다양해져 가는 만큼 사람의 취향과 기호도 다양해지고 있고, 또 어떤 때에는 변화가 너무 빨라서 사람이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기도 한다. 내 가치관이 진리일 것만 같으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기득권층을 비난할지 모르나, 그 기득권층도 한 때는 변화를 부르짖은 젊은 세대였으며, 현 젊은 세대도 언젠가는 기득권층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보이는 사실과 들려오는 소식에 대해서 무작정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일단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현 사회에서 다수가 지니고 있는 윤리관 혹은 가치관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규칙이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지 못한다면,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그 규칙은 최선이 아니다. 세상에 완벽하거나 절대적인 윤리적 잣대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사회 안에서 구성원들은 늘 그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을 의심하고 피해자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뮤지컬 <록키호러쇼>를 보고 온 당신,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극장을 빠져나와서도 조금만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어 보아라. 아니, 당신의 생각은 이미 극을 보기 전보다 열려 있다. 관객들은 프랑크 퍼터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으나,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한 외계인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지배하는 다수의 가치관의 변화를 위한 희생이었을지 모른다. 왜 프랑크 퍼터는 외계인이어야만 하는가. 그를 외계인으로 보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 때문은 아닐까. 세상 모든 프랑큰 퍼터가 사람이 될 수 있는 그 날까지, 뮤지컬 <록키호러쇼>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2017년 <록키호러쇼> 관람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