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作, 『유성의 인연』
오랜만의 히가시노 게이고다. 물론 출판계 입장이 아니라 필자 입장에서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기계처럼 책을 꾸준히 써내고 있지만, 필자는 언젠가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대신 다른 책들을 붙잡고 살았었다. 본인을 위한 일종의 투자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읽은 책의 절반 이상이 히가시노 게이고에 의해 쓰인 것이 편독을 심화시키기만 할 것으로 내심 우려되었다. 덕분에 고전 소설의 맛을 알았지만, 편독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가가 시리즈나 갈릴레오 시리즈로도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작가로서는 완전히 다른 반열에 올라섰다. 일전의 후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선물하였다. 추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로 이름을 알린 작가가 이제는 한계가 없음을 완벽히 선언해 버리는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도 작가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은 잃지 않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까지 한 퍼즐판 위에 놓아 버리는 그 스타일 말이다.
이번에 필자가 읽은 책은 작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도 유명하고, 일본 드라마로도 잘 알려진 『유성의 인연』이다. 산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왜 이제야 읽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제야 읽었는지 궁금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지나가는 말로 아무 의미 없이 하는 말도 아니다. 매일 같이 눈앞에 두고도 너무 뒤늦게 읽은 후회와 분노가 담긴 말이다. 필자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Top 3에 들 정도로 정신없이 읽은 것으로 모자라, 드라마를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스토리 자체에 아직도 빠져 허우적 대고 있기 때문이다.
1년 반 정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지 않는 동안,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히가시노 게이고로 꼽는 것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의심이 들기 시작함을 느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며 마음속을 채우는 감정의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애정이 전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초반을 읽을 때만 해도 요 근래 읽은 고전 소설들에 비해 쉽게 읽히는 문장에 기분 좋은 것이 다였다. 쉬어가는 의미에서 이 책을 마치고 다시 고전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권의 절반도 읽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문장이 쉽게 읽혀서가 아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체는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섬세한 인물 묘사는 삽화 하나 없이도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배경을 묘사하는 데 몇 쪽씩 할애해 가며 큰 힘을 쏟는 것은 아니지만, 책 속에서 등장인물이 특정 시간과 장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만으로 서술은 충분하다. 작가의 필력에 새삼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아리아케 부부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6학년이고 막내는 심지어 1학년이었다. 어느 날 삼 남매는 페르세우스 유성군을 보기 위해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집에 남아 있으라는 오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떼를 써서 따라 나온 막내 시즈나는 날씨가 나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에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그들은 원하던 별똥별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까지 맞는다. 문제는, 집에 돌아간 그들 눈앞에 부모의 주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돗자리 위에 세 사람은 하늘을 보며 반듯하게 누웠다. 시즈나를 가운데 두고 두 오빠가 양 옆에 누운 모양새였다. 고이치가 손전등을 끄자 손 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바로 암흑에 감싸였다.
“오빠, 깜깜해.” 시즈나가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여기 내 손 있지?” 고이치가 대답했다.
『유성의 인연』, 현대문학, 양윤옥 옮김
사건이 발생했던 날 둘째 다이스케는 용의자를 목격하였지만 충격으로 인해 얼마간 말을 잃었고, 막내 시즈나는 고이치 등에 업혀 잠들어 있어 부모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경찰 조사에 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맏이인 고이치뿐이었다. 후에 다이스케가 정신을 차리고 사건 당일 뒷문으로 도망치던 남자의 인상착의를 대충 말해보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범인이 놓고 간 것이 분명한 우산도 단서가 되지 못한 채 사건은 미결 상태로 남은 채 묻혀 갔다.
“형, 내가 좀 더 자세히 봤으면 좋았을 텐데...” 형사들이 돌아간 뒤에 다이스케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몽타주도 그려줬고, 범인은 바로 잡힐 거야. 그리고 우산도 있잖아.”
“우산?”
“그놈이 우산을 잊어버리고 그냥 갔어. 틀림없이 그걸로 뭔가 알아낼 거야.”
고이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뒤편의 장지문이 쓰윽 열렸다. 시즈나가 서 있었다.
“일어났어?” 고이치가 물었다.
울어서 눈가가 부어오른 시즈나가 고이치의 품에 안겨왔다.
“나, 복수할래. 아버지랑 엄마를 죽인 나쁜 놈, 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
고이치는 여동생의 자그마한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만일 범인이 누군지 알면 우리 셋이서 꼭 죽이자.”
『유성의 인연 1』, 현대문학, 양윤옥 옮김
6년 후 또 어느 날,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동 보호소로 보내졌던 삼 남매는 사자자리 유성군을 보기 위해 몰래 탈출했다. 그날 밤과는 너무나 다르게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 악몽의 밤을 만회하듯 그날은 아름다운 유성이 하늘 위를 수놓았다. 감탄한 시즈나와 감동받은 다이스케 옆에서 고이치는 조심스레 자신들이 별똥별 같다고 말한다.
“기약도 없이 날아갈 수밖에 없고, 어디서 다 타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고이치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이어져 있어. 언제라도 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다고. 그러니까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유성의 인연 1』, 현대문학, 양윤옥 옮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성인이 된 셋은 사기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손을 씻을 요량으로 마지막 타깃인 도가미 유카나리를 상대로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아 가장 큰 사기를 치고자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이치는 시나리오를 쓰고 시즈나는 미모로 상대를 홀리고 다이스케는 새로운 직업으로 변신한다. 까다로울 것이라 예상했던 타깃을 잘 속이고 있던 차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아니, 어쩌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카나리의 아버지 도가미 마사유키가 아리아케 부부를 살해한 범인이라는 심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소시효는 끝나가고 있었고, 이제는 경찰이 물증을 찾아낼 수 있도록 새로운 판을 짜야할 시간이 왔다.
필자가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백야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출판사에서만 출판된 것은 아닌데, 필자가 갖고 있는 버전은 총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도 『백야행』의 첫 권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1권만 해도 이백 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고,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연결 고리 하나 없는 퍼즐 조각들이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나머지 두 권을 읽으면서 작가의 큰 그림을 감상할 수 있어진다. 시간 순으로 전개하면서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스타일이다.
『유성의 인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 남매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건, 조금 더 커서 아동 보호소에서 지내는 동안 유성을 보러 간 날, 성인이 되어 사기꾼으로 살아가는 모습까지, 세 장면들 사이에 큰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가 아리아케 식당의 그것과 맛이 같은 것, 가시와바라 형사가 골프에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던 것, 심지어 아리아케 부부가 살해당하던 날 삼 남매는 집을 몰래 빠져나가 놓고도 페르세우스 유성군을 보지 못한 것까지, 모든 요소들이 인물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건의 개연성을 책임져 주고 있다.
“어떻게 이걸?”
“그 반지를 당신에게 선물하는 게 내 역할이었잖아요?” 유카나리는 온화하게 웃었다. “나도 당신들과 한 인연의 끈으로 엮이고 싶군요.”
『유성의 인연 2』, 현대문학, 양윤옥 옮김
늘 아버지와 함께 별을 보던 유카나리는 페르세우스 유성군이 떨어지던 날 만큼은 아버지가 다른 일로 바빠 혼자서 별똥별을 기다려야 했다. 구름에 가려져 삼 남매와 유카나리는 페르세우스 유성군을 보지 못했지만, 그렇다 하여 유성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성이 맺어준 인연의 끈은, 처음부터 셋이 아니라 유카나리까지 넷을 엮고 있었다. 작가의 책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결말은 속 시원하다. 그 와중에 마음속에 남는 잔잔한 울림과 따뜻함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깜짝 선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