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첨예하니 Oct 24. 2024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요?     

예뻐졌다고요? 그런데 왜 불편할까요?


“살 빠졌네요?”

이 말은 다이어트를 위해 애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이 된다.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열심히 움직이고  운동해서 얻은 일종의 인정이니 최고의 칭찬이 된다. 



음식의 유혹을 견디는 것은 참 힘들었다. 특히 커피와 빵이 그랬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엔 무조건 라떼였다. 은은한 커피의 쌉쌀함과 부드러운 우유 거품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이어트라는 것을 한다면서 라떼를 차마 용납할 순 없지만 커피를 완전히 잊고 지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퉁친 것이 아메리카노, 이것만은 죄책감 없이 먹기로 했다.

다이어트 후 유일하게 내게 허락하는 간식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즐기기 위해 카페를 들렀다.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맛있게 크림치즈깜빠뉴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하며 입맛을 다시는 나를 발견하고 부끄러움에 혼자 얼굴을 붉혔다. 카페에 앉아 내 소중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지만 빵의 유혹에서 지고 느낄 참담함이 싫어 도망치듯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포장해서 카페를 나왔다. 


“과자 한 갠데?  빵 한 조각인데? 안 먹어? 독하네.”

“어머, 선생님 오늘도 샐러드예요? 안 귀찮아? 이렇게 도시락을 매번 싸가지고 오네?”

“대단해, 정말이지!”


다이어트를 시작하자, 주변의 입들이 바빠졌다. 응원을 가장한 비아냥과 참견이 기본값이었다. 굴할 순 없었다.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중단할 순 없었다. 감정은 사라지지만 결과는 남는 법. 그들의 반응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살 까기를 지속하자 모두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겪어본 이들은 격하게 공감하겠지만, 5kg 정도 빠진 정도는 서로가 긴가민가한 마음에 적극적인 칭찬과 반응이 오가기 어렵다. 티가 덜 나기도 하고, 저러다 언제든 단 며칠 만에 원래 무게로 돌아가는 주변인들을 워낙 많이 본 탓이기도. 10kg 감량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내 구차한 설명 없이도 누구나 알아볼 만큼 가벼워졌고, 가뿐해져버리고 나자 그 누구보다 설명이 필요 없어진 건 바로 나 자신에게였다. 내가 기특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 선생님 지금 몇 kg이야?, 많이 빠진 것 같아.”

“지금 66 입지? 아닌가? 아직 77인가?”

“선생님은 키가 크니까, 살이 빠져도 아직 몸무게가 좀 나가는구나. 뼈 무겐가?”


분명 나의 변화를 알아채고 아는 척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것인데 마음 저편에 불편함이 일어난다. 그냥 칭찬이고 응원의 말인데, 내가 필요이상으로 불편해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외모에 대한 칭찬이 편하지는 않다. 칭찬 멘트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본심 ‘오랜만이네’ 혹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가 보군’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내게 외모에 대한 저런 관심은 얼떨떨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런데 요즘은  동네에 그냥 다니다 얼굴만 아는 사람들이  깜빡이도 없이 불쑥 말을 건넨다.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요?” 


사실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 변화를 알아보는 것도 부끄러운데, 아는 체를 한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주춤하는 사이 다음 질문이 들어온다.


“어디 아파요?”

“아님  됐고. 근데 정말 엄청 빠졌다. 못 알아보겠어.”


그러고는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간다. 옆에 있던 남편은 누구냐고 묻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길을 걷다 보면 울컥 짜증이 난다. 내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예의 없이 하는 말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속상해진다. 



언젠가 어느 방송에서 개그우먼 이국주는 남자들이 칭찬인 줄 알고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오늘 화장 잘 먹었네?라는 말이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화장과 패션을 스캔하고 바로 내어놓는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유행어를 사용해서  ‘화장까지 호로록 잘 먹었냐’는 말이냐고 분노했었다.


이와 같은 외모 평가는 미디어 속의 연예인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만연해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가 나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말을 듣고 자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게  부모 중 누구를 닮아 예쁘다 등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고 성장하는 아이에게도 얼굴이나 몸에 대한 칭찬을 한다. 외모에 대한 언급이 순수한 의미의 칭찬이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는 걸까? 칭찬을 포함한 외모에 대한 언급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고 느끼게 한다. 이를 자주 느낄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외모 평가는 조언이고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무례감을 줄 수 있다. 


“예뻐졌다고요? 외모 칭찬 거절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