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실패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시즈오카 역에서 오차즈케 한 그릇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뜨끈한 녹차를 부은 밥 위로 명란이 녹아내리고, 김이 풀어졌다. 하루의 첫 끼로는 나쁘지 않다. 오늘의 루트는 간단했다. 전철을 타고 시미즈로 가서 JR패스로 공짜로 탈 수 있는 페리를 타고 이토항으로 들어가 '슈젠지'로 향한다. 쿠가이 대사가 만든 오래된 사찰을 둘러보고, 바닷물을 데운 온천에서 하룻밤을 잔다. 운이 좋으면 욕조 속에서 후지산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상 가능한 평화로운 하루였다.
하지만 시미즈 항구에 도착했을 때 오늘의 계획은 무너졌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았다. 전광판엔 ‘운항 중지’가 깜빡였고,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내일도 결항일지 모릅니다”라고 짧게 말한다. 그 순간, 머릿속 지도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흐린 하늘을 보면서도 배를 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후지시로 돌아와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의 낯선 거리, 너무 조용한 골목, 자판기조차 없는 길. 구글 지도가 말하길 ‘해안가 식당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 말 하나만을 믿고 8킬로미터를 걸었다. 시라스 요리를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에 도착했고, 배를 타지 못한 대가로 얻은 건 작은 멸치덮밥이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마치 오늘 처음 입을 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여행이에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남들에게 한번 퍼주는 멸치를 두 번이나 내 밥 위에 얹어줬다. 그녀 나름의 환대였고, 미묘한 연대였다.
멸치 치어 수천 마리쯤을 뱃속에 넣고, 다시 8킬로미터를 걸어 후지시로 돌아왔다. 걷는 중간쯤에서 오늘 머물 숙소를 예약했다. 후지산이 잘 보인다는 료칸(旅館)이었다. 하지만 그냥 1970년대식 건물의 진짜 '여관'이었다. 아무런 낭만도 없는 다다미 방은 이불도 축축하고, 오래된 세월의 냄새가 가득했다. 도저히 그냥 잘 수 없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불부터 말렸다.
여관 앞 슈퍼마켓에서 참치 회와 캔맥주 두 개를 사서 다시 다다미방으로 돌아와 좌식 테이블에 펼쳤다. 텔레비전에서는 지방 방송이 흘러나왔고, 나는 참치를 씹었다. 노을은 지고 있었지만 후지산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후지산을 너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바람이 말린 이불을 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몸이 간지러웠다. 무릎과 복부, 팔에 무언가 닿는 듯한 감각.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벼룩 한 마리가 이마를 지나갔다.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누웠고, 다시 간지러웠다.
잠을 더 자기는 틀렸다. 새벽 3시에 혼자 공용 욕탕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물은 따뜻했고, 몸은 부드럽게 녹았다. 욕탕에 앉아 나는 벼룩을 떠올렸다. 어쩌면 벼룩은 나를 향한 하나의 질문이었다. 벼룩 한 마리는, 내가 이 여행에 들고 온 안일한 기대를 물고 달아난 것 같았다. 배를 타려고 했고, 괜찮은 료칸에서 노을 지는 후지산 정상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 사치스러운 생각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왜 쓰는가? 그건 늘 나중에야 알게 된다. 처음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쓰고, 조금 지나면 나를 이해하기 위해 쓰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일까? 후지산은 분명히 거기 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그 산과 마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문득 그런 질문이 나에게 들어왔다. 노트북에 답을 썼다. 풍경이 주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듣기 위해 걷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후지산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여행은 실패를 피하는 일이 아니다. 실패 안에서 방향을 바꾸고, 발을 옮기고, 다시 걷는 일이다.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괜찮다. 그럼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테니까.
실패한 하루 대신 얻은 문장 몇개에 감사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새벽빛이 방 안에 스며들었다. 커튼 틈 사이로, 후지산의 실루엣이 조용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반쯤 가려진, 흐릿한 모습은 첫인사처럼 수줍었다. 나도 인사를 할까 하다가 ' 반가워. 첫 만남은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 다시 배낭을 쌌다.
https://maps.app.goo.gl/RCEotvU2CgqrAwq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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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정보보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편씩 나눠서 읽으셔도 좋지만, 소설처럼 처음부터 천천히 읽으셔도 좋습니다. 첫회 링크입니다.
https://brunch.co.kr/@heinzbecker/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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