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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가마쿠라, 바닷마을 슬램덩크.

여행에는 가끔 '무의미함'도 두 세 스푼 필요하다.

by 하인즈 베커
d0177632_23445188.jpg 문사식당 메뉴판 / 하인즈 베커 사진


후지산을 떠난다. 귀국행 비행기를 시즈오카 공항에서 타야 함으로, 며칠 후 다시 후지산을 만나게 될 것이기에 '잠시 안녕, 후지산'이라고만 인사를 하고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마쓰다로, 그리고 다시 후지사와로 향하는 전철을 갈아탔다.


도쿄로 바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여행에는 가끔 '무의미함'도 두 세 스푼이 필요하다. 덜 효율적이더라도, 풍경과 마음이 함께 굽어지는 그런 하루를 찾아내고 보내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 솔직한 여행'이다. 그래서 오늘은 가마쿠라에 간다. 나에게는 바다와 마을과 절벽 위로 '에노덴'이란 전차가 느긋하게 달리는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2019_02_17-1-2.jpg 에노덴 / 하인즈 베커 사진


후지사와역에서 에노덴을 탔다. 녹색과 아이보리로 칠해진 세 칸짜리 전차는 낡은 바퀴를 달그락거리며 선로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는 속도, 느긋하게 지나가는 창밖의 마을들을 보다가 나는 에노시마역에서 내렸다. 이곳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 되는 동네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고 그해 겨울에 여기를 찾았었다. 영화에선 다툼도, 사랑도, 죽음도, 후회도 모두 바다 앞에서 흘렀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는데, 이 마을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을 나오자마자 바람 속에 바다의 냄새가 섞인다. 짠 냄새가 묻은 공기, 작은 역사와 철길 옆으로 걸려 있는 형형색색의 간판들. 나는 영화 속 네 자매의 길을 따라가듯, 문사식당(文佐食堂)을 향해 15분쯤을 걸었다. 식당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낮은 천장, 오래된 목재문, 벽 가득 손글씨 메뉴판. 내부엔 현지인과 여행객이 뒤섞여 있었고, 나는 안쪽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사자에동(さざえ丼)을 주문했다.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소라 조개와 계란을 함께 덮은 덮밥이다. 우메보시도 하나 달라고 했다. 일본에서 우메보시는 단순한 매실장아찌 그 이상이다. 그 집 안주인의 손맛을 평가받는 상징적 음식이다.


d0177632_23364723.jpg 사자에동 / 하인즈 베커 사진



사자에동은 금세 나왔다. 반쯤 익은 계란 사이로 얇게 썬 조개가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달짝지근한 간장 소스가 밥에 스며들고, 뜨거운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장국과 오이절임이 곁들여졌다. 조개의 질감은 부드러웠고, 계란은 입 안에서 흐르듯 퍼졌다. 우메보시부터 입안에 넣았다. 꽤 훌륭했다. 짜지 않고, 은은한 신맛이 입 안을 정리해 줬다. 그 후 밥 아래까지 스며든 사자에동의 감칠맛이, 깔끔하게 준비된 입 안을 천천히 채웠다.


혼자 먹는 식사는 대개 속도가 빠르지만, 나는 가능한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식당 안의 풍경, 바깥의 빛, 바다의 냄새를 모두 식탁 위로 끌고 오려고 노력했다. 영화 속 자매들이 서로의 아픔과 온도를 느끼며 밥을 먹던 장면처럼 - 나는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여러 가지 추억과 회한을 식탁 위에 올려 보았다. 그것들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어야 했기에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에노시마역에서 가마쿠라 고교 앞 역까지 바닷가를 따라 걷기로 했다. 바닷바람이 강해졌고, 파도는 멀리서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씩 자전거를 타고 옆을 지나쳤고, 해변에는 벌써 여름을 시작한 서퍼들이 보였다.


<슬램덩크> 바닷가 앞 전차역 / 하인즈 베커 사진



30분쯤 걸었을까? 가마쿠라 고교 앞 역에 도착했다. 몇 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땐 <슬램덩크> 때문이었다. 만화 속 철도 건널목과 바다를 현실에서 마주한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지금은 그 설렘이 조금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역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사람, 철로 너머로 바다를 배경 삼아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열기와 시끄러움은 잠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에게도 저런 열정이 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나는 그 장면의 일부가 될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 무리를 조용히 지나쳐 역 안으로 들어갔다.


해는 서쪽 바다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후지사와로 돌아가는 에노덴을 기다리며 나는 역 안 벤치에 앉아 옐로우와 마젠타가 물감처럼 섞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이 황홀해서 몇 번의 전차를 보내며 아껴서 보았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에는 별들이 주인공의 자리로 천천히 등장하고 있었다. 가마쿠라의 밤공기엔 여름의 초입이 얇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단선 플랫폼으로 또 한 번 에노덴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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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정보보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편씩 나눠서 읽으셔도 좋지만, 소설처럼 처음부터 천천히 읽으셔도 좋습니다. 첫회 링크입니다.


https://brunch.co.kr/@heinzbecker/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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