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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도쿄대, 권력과 저항의 인큐베이터.

무거운 시간을 지나야 가벼움이 빛나고.

by 하인즈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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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의 중심은 도쿄대였다. 일본 근대의 권력과 지성이 출발한 기점. 나는 무엇보다도 적문(赤門)을 보고 싶었다. 에도 막부의 딸이 시집오며 세운 그 붉은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학문과 권력이 맞닿은 상징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 문을 통과하며 일본의 오늘을 만들었다.


비 내리는 교정은 축축한 벽돌 건물과 젖은 마로니에로 가득했다. 우산을 쓴 학생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했다.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같은 문인들만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끌었던 여러 이름들. 도쿄대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인큐베이터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지식과 도쿄대의 졸업장은 언제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뿌리가 깊을수록 저항 또한 이곳에서 솟아났다. 1960년대 후반, 전공투 학생들은 이 교정을 점거했다. 낡은 건물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흰 마스크 위로 헬멧을 눌러쓴 그들은 단순히 제도에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그 열기는 1969년, 미시마 유키오가 이곳을 찾아 학생들과 벌인 공개 토론으로 이어졌다. 검은 군복 차림의 미시마는 단상에 서서 “행동 없는 말은 허무하다”라고 외쳤고, 학생들은 차가운 논리와 날 선 언어로 그를 맞받았다. 열띤 호흡과 함성, 침묵이 뒤섞인 순간, 권력과 저항이 같은 무대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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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를 걷다 문득 엔도 다다오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급진적이라 불렸던 그의 콘크리트 건축은 이제 제도 속에 안착해 있었다. 저항의 형식(Form)이 제도라는 내용(Content) 속에 봉인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권력과 저항의 관계가 갖는 필연성을 다시 생각했다. 저항은 권력의 바깥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태어나고, 결국은 다시 권력의 언어 속에 흡수된다. 두세 시간 동안 나는 교정을 돌며 그 무게를 곱씹었다. 이곳은 지성의 요람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장치였고, 저항조차 그 장치 속에서만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학은 결국 국가와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아니, 사회의 모순을 가장 날것으로 드러내는 실험장이었다.


교정을 빠져나오며 다시 적문을 바라봤다. 붉은 문은 묵묵히 서 있었다. 권력을 향한 발걸음이든, 저항을 향한 발걸음이든 모두 이 문을 통과해야 했다. 문은 그 자체로 질문이었다. ‘너는 어느 쪽으로 들어설 것인가, 혹은 어느 쪽으로 나갈 것인가.’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했다. 권력과 저항은 적과 동지가 아니다. 서로를 정의하며 함께 자라난다. 권력이 있기에 저항이 태어나고, 저항이 있기에 권력은 스스로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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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눈에 비친 도쿄대는 권력과 저항이 끝없이 맞부딪히며 서로를 길러온 공간이었다. 붉은 문 앞에서 나는 그것을 삶의 은유로 읽었다. 우리는 누구나 문 앞에 선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우리는 권력과 저항의 흐름 속에 설 수밖에 없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에 맞서 길을 찾으려 했던 작은 발걸음들이었다.


도쿄대의 적문은 그 순환의 출발점이자, 아직 닫히지 않은 질문으로 내게 남았다. 결국 여행도, 인생도 이런 균형 속에서 완성되는 것 같다. 무거운 곳을 지나야 가벼움이 빛나고, 가벼운 순간이 있어야 다시 무거운 시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https://maps.app.goo.gl/hv5efhfd2ZEvEy4y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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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정보보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편씩 나눠서 읽으셔도 좋지만, 소설처럼 처음부터 천천히 읽으셔도 좋습니다. 첫회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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