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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Jul 05. 2022

《헤어질 결심》관람 ─ 서점일기 2022.07.05.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헤어질 결심》 관람 後, 記



주의!! 스포일 有


《원초적 본능》 순한 맛?!


집착으로 발현되게 마련인 편집 증세를 담아내는 데 '수사(搜査)' 만큼 알맞춤인 틀거리도 없을 터.

때문에 이같은 외형 빌어다 쫓기고 쫓는 애증 구도 거듭,하니 절로 이루는 클리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예서 그 집착을 덜어낸 바~ 따라서 그에 따르게 마련인 광기는 물론이거니와 그 광기를 동력 삼아 치달을 게 빤한 치정-극(劇) 서사는 비켜 서게 됨.


한편 나로서는 이게~ 우연이 빚은 결과이지, 기획 단계부터 분명하고도 선명한 의도로 접근하여 생산한 결과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 왜냐하면 그렇다고 딱히 무언가를 보여주었나 하면 그건 아니니. 한편 오히려 그래서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소위 영화평론가 여러분이 남겨놓은 평(*포털 업체 DAUM에서 영화 섹션 검색 후 확인)을 보니, 대체로 대중 눈높이(?)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대가(?)가 보여주었노라 상찬(!) 일색. 그런가~ 싶다가도 뭔 소린가 싶으니 나로서는 잘 모르get다. '_'




섹스를 부부 간 관계의 긴밀도를 가늠하는 지표로 여기는 아내(이정현 분). 그런 아내를 이해하니 애를 쓰는 남편 '해준'(박해일 분). 이해에서 비롯한 나름의 배려를 사랑으로 여기는 남편은 그러나 (애당초 그러니까 실은 혼전에도) 마음 한 구석 자리해 있던 헛헛함이 (다시금) 거스러미처럼 이니 실감. 하여 뭔지 모르게 불편. 그러나 구체적이어서 형언 가능한 정도의 감(感)은 아니니, 심연에 잠긴 상태 그대로 대체로 무감각인 것처럼 일상 구가. 아내를 사랑(=배려)하지만 뭔지 모르게 충족되지 않는 상태로 결핍을 막연하게나마 인지. 그런 와중에 '서래'(탕웨이 분)를 맞닥뜨림. 이후 심연으로부터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결핍. 남편 '해준'은 아내로 메울 수 없던, 충족되지 않던 무언가를 '마침내'!! 구체적으로 실감. 해서, 잠복 빙자 '서래'를 살피며 이르는 독백은 제 결핍에 언어로 옷을 지어 입히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피의자라기보다, 참고인 소환 사정청취. ← 실은 이를 빙자, 끌림의 정체를 가늠하려던 '해준'의 의도로 보아도 좋겠고. '시마-스시'는 둘 사이 가로놓인 섬[島, しま]을 건너기 위한 가교인지 어떤지 몰라도 식사 후 테이블 치우고 닦으며 서로 간 오가는 손길은 한 번 부딪는 바 없이 부드럽게 맞물리는 것으로 연출된 걸 보면 의도로 읽어도 좋을 성싶다.


'해준'의 불면을, 결핍의 정체를 몰라 방황 거듭하는 그의 심리가 의식 수준에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한다면 '서래'로 인해 경험한 호흡의 동화(同化) 그로써 취한 숙면이야말로 그에겐 특별하게 여겨졌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아내와 함께하면서는 경험치 못한) 정서(情緖)의 프리퀀시 일치, 그에 기인한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제게 딱! 들어맞는, 호환 이상의 일체감에 저릿했을 테니. 앞뒤 재지 않고 빠져드는 모양새. 그야말로 fall in love. (유사 체험으로 족함을 감각하던 기관. 이의 실패를 수긍, 참 체험 위해 기관 생성 단계의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오르는 비유로 '해파리'를 읽을 수 있겠는데 진부하니 넘어가자. 그를 견인하는 '서래'라니, 너무 진부하잖나 솔직히 -_-;;) 


의도를 바탕 삼은 계획에 입각, 연기(演技)로써 알리바이는 물론 저지른 일의 출구 마련 위해, 자초한 이상 실상 제가 프로듀싱한 거나 다름 없는 '불행'에 완벽히 이입하는 소위 '악녀'. 숱하게 반복 묘사된 캐릭터를, 이방인의 청순함으로 치환하여 얼버무리는 '서래'. 처음부터 탕웨이를 염두에 둔 설정이면, 납득은 하겠지만.. 근데 이게 탕웨이 본인에게 득이 되는지는 모를 일. 사실 《만추》 이전에도, 아니 애당초 《색계》부터 계속 복제 연속인 캐릭터 아닌지? 사실 그렇게 거듭하여 복사되는 지경의 캐릭터라는 게, 모종의 남성 판타지에 봉사하는 여주인공 아닌가? 관객이 기대하는 바에 부합하는 캐릭터에 충실이라면 뭐 나름 가치 있겠지만 연기자라면 이를 배반하는 과단성에서 지속가능을 스스로 발견, 도약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하기사 내 알 바 아니다만.


벽지니 옷이니 어차피 빤하니 젖히고. '붕괴' 발언 후 떠나간 '해준'. 직후 천정부터 마치 수면 아래로 향하는 듯한 카메라 웤. 가능하다면 피하고팠던 '서래'로서는, 무의식의 심연 가운데 단단히 똬리 튼 도덕률에 좌초할 밖에 도리없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제야 비로소 '불쌍한 여자'로 화하는 '서래'. 피의자 신분이 아니면, 그로써만 합(合)이 될 수 있는 관계. 내재한 요소로 불안. 도래하는 파국을 피할 길 없는 운명의 수인(囚人). 이렇게밖에 가닿지 못하는 제 운명을, 수긍인지 초월인지 불분명한 그대로 감내하자고 '마침내'!! '헤어질 결심'. 제가 사랑하는 그이 '해준'을, '붕괴' 이전 자리로 복귀시키기 위해. 동시에 '해파리' 아니 태아 아니 이전 배아 아니 그 이전 상태의 시원으로 복귀(거기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로 제가 파낸(지은) 모래-자궁에 스스로 입처(立處).


그럴싸한 알레고리지만 새로운 건 아니니 호들갑은 역시 좀~ ^^;;




해당 콘텐츠 소비로 대리 배설이든 충족으로 소위 카타르시스 경험. 그로써 값어치, 했다 내지 한다라고 할 순 있겠다. 그런데 '이런 사랑도 있다' 내지 그'~를 보여주었다'는 후기는 글쎄올시다. 낯간지럽긴 해요, 솔직히! '_' 극 바깥 현실에서 '그'든 '그녀'든 접근 선행, 추파 우선하였거나 말거나 그에 기울어 '마침내' 끄달리기까지 그로써 '붕괴' 자초하는 이편의 '그녀' 내지 '그'의 '사랑'이 제 욕심에서 비롯하였다는 걸 부정할 순 없으니. 그러니까 이웃의 '그'와 '그녀'가 이랬든 저랬든 간에 결국 그 이웃의 '아내'와 '남편'을 탐한 자신의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 얘기.


때문에 이편에도 또 저편에도 서 본 이라면, '이런 사랑도 있'니 어쩌니 보다 '그래서 뭐.. 종국엔 부질없음에 부쳐지고 말..'이라는 체념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사랑? 사랑이라..



붙임 1. 김신영 하드캐리~라는데 강호동과 행님아~ 시절부터 벌써 몇 년이냐?! 그 짬에 연장선 상의 캐릭 하나 소화 못하면 그거야말로 문제 아니나??


붙임 2. 소위 그 해시태그라는 건 참 생뚱맞은 데가 있구나~~ 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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