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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Aug 18. 2022

서점일기 ─ 까칠하게 산다는 것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까칠함,

무엇보다 아니 다른 누구보다 저 자신을 우선하여 판단하는 때 비로소 취하는 가치이자 이루는 태도 아닐지.


아울러 공감,

반드시 그와 같은 입장 그러니까 자리에 서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외려 대척에 선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사람의 일이로구나"하는 명징한 깨달음.

이러한 토대 위에서의 이해를 이르는 표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이처럼 차이를 수긍하기에 비록 다르지만 사람인 처지로 共-感 할 수 있지 않은지.

이를 바탕삼기에 다투어도 끝끝내 저버리지 않으니 기대.

때문에 공감을 올리는 입에 함부로 '손절' 운운 저어할 테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일구이언의 표리부동을 범하고 있는지)


이런 태도에서 비롯하니 자성自省이니, 제 눈의 들보로 자리한 편견을 발견하게 마련.

때문에 이를 강화할 뿐인 주변과도 거리두기 가능. 이는 자기 자신을 우선하여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외려 반대이니 제게서 비롯한 편견으로부터 주변을, 그러니까 지인/친구 등으로 구성된 참조집단을 보호키 위한 수단으로써 거리두기이다.

마치 개신교 성경에 언급된 바 '연자맷돌 목에 달아 수장'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경고를 실천하듯.

주변 '실족' 지경을 미연에 방지코자 먼저 저를 점검하는 식으로 나타날 테다.

이럴 때에나 겨우 '내 탓'이라 자임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니 이에 이르지 않은 상태로 '내 탓'을 말로 이른들 겉돌 밖에 도리 없는 것이고.


한편 자기 반성을 우선하는 그 시선으로 바깥을 살피고 타인을 헤아리기에 설사 당장 주변인이 자기와 같지 않아도, 저를 먼저 살피지 못하는 지경일지언정 그네들의 갱신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이처럼 자기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 위에서, 저와 동일한 그대로 타자의 '개과천선'을 기대하며 '괄목상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역시 개신교 성경에 등장하는 것처럼 설사 '간음한 여인'으로 밝혀진 현장에서조차 돌부터 집어드는 우를 범치 않게 되는 것.

사실 그 같은 현장/사건/사례에서 보이는 자신의 반응과 태도야말로 현재 자신이 처한 말그대로의 '바닥'이므로.

그렇게 말로써 행동으로써 드러내는 자리, 그곳이 지금 처한 '제자리'이기에.

때문에 벗어난 것처럼 여기는 자체가 착각일 수 있음을 항시 염두에 둘 수 있다.

반면 이에 닿지 못한 상태로는, 크고 작은 외부 충격에도 가벼이, 간단하게, 순식간에, 제 바닥과 마주할 밖에 도리 없는 것.

뒤집어 이르면 애당초 한번도 벗어난 적 없음을 반증하는 사건이겠다.

붙박은 채로 계속이었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였을 따름.

그러니 과거에 붙들린 게 아니다.

자신이 붙든 과거요, 지금도 현재에 거하지 못하고 과거를 되풀이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를 두고 나는, 살아/있다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로 질문은 옮겨져야 마땅할 테지.

그러니까 당장 자신이 거하는 곳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가로 바꾸어 자문自問 여부.

이것이 성숙의 지표요, 판단 기준이지 않을까. 자답自答으로써만 얻는[得]는 길[道]인 만큼.


하면 이의 대척인 입장을 두고 어리다(혹은 어리석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처지에서 붙드니 자아自我요, 이로써 배제 일삼는다면..

이런 상태의 자신을 구심 삼아 구획한 서클, 이 원 안쪽으로 국한할 뿐인 공감/이해라면 이를 두고 공감/이해라 이르는 자체가 자가당착 아닌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지 못하면서 사함 이상 존중으로 대우/대접 받아 마땅한 것처럼 굴고 있는 건 아닐까.

한편 이 또한 '사람의 일'이어서 이 세계는, 솟구치니 염오일 따름이고 이로써 지속가능인 갈등인 것일지도.

도덕률로 마름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이러한 사정과 형편을, 제 눈을 가려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

이로써 거듭할 뿐인 장두노미藏頭露尾의 어리석음이라면.

어쩌면 이렇게 구성/재생산 하니 자승자박의 매트릭스일지도..


자타 구별 없이, 오히려 저를 필두로 하여 규명하고 이해하고자 몸부림에 필사적일 때 사람은 겨우 이해에 가닿는지 모른다.

이러한 몸부림을 통해서만 자기 '바닥'을 박차고 비로소 놓여나니 과거로 그제야 벗어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후에 '애도' 또한 주도하게 되는지 모른다.

추억은 추억으로, 그저 담담하게 세월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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