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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일리 Apr 23. 2024

베를린 살이 1년차, 손익계산기록

장면을 잘게 나누면 단면이 될까

베를린에 온지 만으로 1년이 다 되어간다. 

원래 출발하려던 날짜에서 급작스럽게 하루가 밀려, 2023년 4월 24일에 인천에서 출발해서, 4월 25일에 베를린에 도착, 그리고 26일부터 바로 출근을 시작했으니, 정말로 꼬박 1년이 되었다.


1년이라는 사이클을 한 번 돌리고 나면 나는 이 나라, 이 도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작년 어느 때부터인가 궁금했던 차였기에 이 글을 써본다. 


베를린에 살면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들을 생각나는 대로 써본다. 


좋은 점들

1. 시간을 더 의도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이건 자의 반 타의 반이기도 한데,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인프라좁은 인간관계다. 

우선 인프라부터 설명하겠다. 유럽의 여느 도시들이 그렇듯이 퇴근을 하고나면 갈 곳이 많지 않다.

가족주의적인 삶의 양식과 유럽의 인프라가 만나면 인생은 빠르게 노잼 곡선을 타게 된다. 

한국에서는 꼭 유흥이 아니더라도 밤에 갈 곳이 얼마나 많던가. 다양한 컨셉을 가진 카페, 늦게까지 운영하는 쇼핑몰 & 서점 등, 꼭 여럿이 아니더라도 혼자서 바람 쐴만한 곳들도 지천이다. 

베를린에서는 제 3의 공간이라고 할만한 곳들이 정말 몇 없다. 저녁에 갈 수 있는 공간은 수퍼, 식당, 바, 헬스장, 클럽 외에는 거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개는 일을 마치고 헬스장을 갔다가 집에 오면 하루가 일찍 마감이 된다. 

다음 요인은 베를린에서의 좁은 인간관계다. 아무래도 나와 남편처럼 성인이 되어서 직장 때문에 이민을 온 사람들은 자연히 아는 사람의 풀이 좁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각종 사내 모임, 친구들, 각종 경조사 및 가족 모임 등으로 월급이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시간이 없어져있곤 했는데, 독일에서는 그럴 일이 현저히 적다. 


2. 항상 공기가 맑다.

미세 먼지의 종주국(?)에서 온 탓에 왠만한 공기 질에는 끄덕도 없는 나다. (한국에서도 둔감했던 편) 

그래도 2년 반 정도 바르셀로나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번엔 독일에서 1년을 보내고 나니, 확실히 공기의 질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고 코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의 느낌처럼 좋은 느낌이 또 있을까. 베를린이 날씨는 좋을지언정, 공기가 나쁜 날은 결단코 없다. 아무리 하늘이 잿빛인 날이어도 공기 하나는 끝내준다.  


3. 자연과의 연결이 용이하다.

베를린 어디에 있든 자연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한국의 자연은 산이나 강으로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인공적으로 조성된 하늘공원 같은 느낌이 나는데에 반해, 베를린의 자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등장하기도 하고, 스케일도 크다. 동네에 흔하게 있는 가로수조차도 높이가 한국 가로수보다 훨씬 높아서 마치 하늘의 층고가 높아진 느낌이 든다. 

위에서 이야기한 우연한 만남이 아닌, 자연과의 본격적인 만남도 너무나 용이하다. 베를린 어디에 있든 조금만 대중 교통을 타고 나서면 공원(이라고 쓰지만 숲이나 마찬가지인 경우도 많다), 숲, 호수, 강과 쉽게 닿을 수 있다. 베를린의 공원은 공원 안에 편의 시설도 없는 경우가 많고, '내가 여기서 실종이 되더라도 누가 날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녹음이 짙은 경우도 있다. 이렇듯 독일의 자연에는 인공적이고 섬세한 터치보다는 날 것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다.   


4. 모든 사람들과 대등하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갑과 을을 상정하고, 과도할 정도로 책 잡히지 않게 행동한다는 느낌(kowtow 하는)을 받을 때가 있었다. 직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불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청소 노동자들이나, 무리한 요구를 받아도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인턴들처럼 말이다. 

여기서도 당연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꼭 갑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를 제공받으러 온 사람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영업장에 온 것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이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말 그대로 안 된다고 말하면 그 뿐이다. 

물론 회사에 가서 아웃소싱을 하거나 외부 컨설턴트 등을 고용해서 일을 하다보면 갑을의 위치가 조금 더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으나, 한국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5. 건강한 회사 생활이 가능하다.

회사 생활이야말로 편차가 너무 커서 일반화 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독일의 회사들이 갖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다. 이것만 따로 써도 포스팅 서너 개는 너끈히 나올테지만, 요약을 해보면 일단 병가가 자유로운 편이고, 연차도 연간 25개-30개 정도로 넉넉하다. 그리고 연차를 상사에게 허가를 받는다는 개념보다는, 미리 통보한다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보면 된다. 물론 내가 말하는 회사 생활은 인더스트리 기준이고, 컨설팅이나 PE, VC, IB 같은 특수직들은 여기도 80시간, 100시간씩 일 한다. 그래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들 휴가는 가더라. 휴가 = 인간된 자의 권리이다. 


6. 주변 국가로 여행을 가기 용이한 편이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연차도 많고, 도시 자체가 유럽의 중앙에 위치하다보니 저가 항공들도 꽤 취항을 한다. 런던이나 파리에 비하면 아주 매력적인 허브라고 보긴 어렵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주요 도시들과는 연결이 용이하다. 


7. 각자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에서는 소위 대세, 국룰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주식 투자든, 명품 쇼핑이든, 피부과 시술이든, 디딤돌 대출이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 간에 정보가 빠르게 공유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쓸 데 없는 알림을 계속 보내주는 앱처럼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베를린은 워낙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멜팅 팟의 느낌은 아니고, 모자이크의 느낌에 더 가깝다) 이런 획일화된 관심사는 매우 드물다.   


좋은 점을 일곱 가지나 적었으니, 아쉬운 점도 적어본다. 

 

1. 가족들과 자주 보지 못한다.

베를린은 독일 내에서도 인천까지의 직항이 없는 도시라서 (무늬만 수도) 이 점이 참 아쉽다. 현재 기준 한독간 직항은 뮌헨과 프랑크푸르트에만 있다. 한국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연중 행사처럼 되는 것이 슬프다. 유럽 친구들은 가족들을 보러 수시로 저가항공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비용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이 점이 나에게는 큰 마이너스 요인이다. 


2. 음식, 음식, 또 음식.  

김구 선생님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바르셀로나에 2년 반을 거주하는 동안에도 '식당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평타는 치지만 특출나게 맛있는 것은 아니었달까. 한국의 맛집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의 맥시멈이 10이라면 스페인은 아무리 맛있어도 7 정도였다.

독일은 내가 많은 것을 내려놓았는데도, 그 이하를 보여주었다. 0층이 제일 밑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가 있는 것이다. 백 년 넘게 감자 요리만 취급한 오래된 맛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지극히 평범한 감자 요리가 나온다던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가. 대한민국의 격정적인 외식 신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맛이었다)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래도록 관찰한 결과, 독일인들은 우선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는다. 때문에 음식이 주는 만족감이 10일 필요가 없고, 5정도만 되어도 만족하는 것이다. 이 토픽 또한 고장난 레코드판 처럼 2시간, 3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주제이기에 여기서 이만 말을 줄인다. 


3. 드나듦이 많은 도시.

베를린은 전형적인 transitory city다. 뜨내기들의 도시랄까? 몇 년 경험해보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앱의 퍼널과 비슷하다. 누군가 계속 새로 유입되고, 기존에 있던 유저들이 (churn)을 한다. 지금은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물론 이걸 장점으로 보자면 계속 신규 유저가 들어오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인이 떠나기 전까지는 계속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4. 담배 연기, 대마 연기를 맡기가 용이하다.

앞서 맑은 공기를 이야기 했는데,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불쾌한 냄새를 맡게 되는 경우도 많다. 여느 유럽 도시가 그렇듯 담배 연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대마 연기 또한 그렇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딜 가도 서울의 번화가처럼 길에 사람이 꽉꽉 차있진 않기 때문에 이런 냄새를 피하기도 용이하다. 그냥 다른 쪽으로 피해서 걸으면 된다. 

 

5. 점점 비싸지는 생활비.

최근 몇 년간 베를린에 유입 인구가 많아지면서 생활비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나도 그 중 하나). 그 중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주거 비용. 지난 포스팅에서 쓴 것처럼 월세가 굉장히 비싸졌다.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큰 단점이다. 


일단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 

매년 업데이트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는 부분이 있거나, 추가하거나 덜어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적용해가면면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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