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 보면 모든 사람이 나를 하나의 노동력으로 취급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출산 전까지 쌓아온 어떤 커리어도, 정체성도 그 현장에서는 의미가 없다. 임신기간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내 손 위로 떨어지고, 오늘부터 육아 1일이 된다. 그 당황스러움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이제껏 입었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그동안 막연히 생각해왔던(스스로 이상적이라 여겼던) 엄마라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는다.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진 나라는 존재.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세상 제일 가는 존재, 제왕의 자리에 앉은 아기이다.
(이후의 과정은 눈물이 나서 생략..)
사람이 책임과 의무로만 존재하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는 능력이 다소 떨어질 수 있다. 내가 해야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능력도 그렇다. 그런 것 까지 구분하기에는 너무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쳐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머리를 쓰기 전에 다리가 벌떡 일어나고 손이 먼저 나간다. 물론 아이에게는 그렇게 해줘야하겠지만 남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에게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흠뻑 빠져서 육아를 하다가 그 다음으로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이성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인성 빻은 남편들은 이 시기에 와이프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우해주지 않는다. 육아에 허덕이는 사람이 날때부터 저렇게 비굴하게 살아 온 사람인 것 처럼 대한다.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언젠가 이 유아기 육아가 끝나고 아내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 왕성하게 사회활동 하던 그 여성으로 돌아왔을 때 지난 몇년간이 당신의 진짜 인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거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테스트였고 이제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저 시기의 엄마라는 존재는 주변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정말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게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이 많은 이유라 생각한다.
양가의 가족들이 달려드는 것도 이 때다. 그 동안 철저하게 자기가 그어놓은 선을 지키던 까칠한 딸, 멀게만 느껴졌던 며느리가 넋이 나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 이렇게 좋은 먹잇감이 어디있을까. 만약 친정 엄마 혹은 시어머니가 정기적으로 육아를 도와주기까지 한다면 전에 없이 자주 만나게 되고 약해진 멘탈을 뚫고 두 어머니의 사고방식이 뚫고 들어오기 쉬워진다. 평소 가치관이 같았다면 둘은 이 기회에 베프가 될 수 있겠지만 만약에 달랐다면 일방적인 세뇌가 될 수 밖에 없다. 도움을 받고 몸은 편해졌지만 정신은 더욱 피폐해 질 수 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이상한 느낌. 하지만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아 볼 여유조차 없다. 분명한 것은 난 저 두 어머님의 기준(과거의 가치관)에는 영 못미치는 못난 사람인 것이다.
아이가 좀 크고나서 되돌아보니 출산 전의 나와 육아 중의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아기가 돌 전 일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친구도 있다. 내가 하나의 노동력으로만 존재할 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고 아무런 생동감과 자유도 느낄 수 없으면 그건 내가 아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내 팔다리를 움직여서 일만 하다 간 것과 같지 않을까.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내가 타인이 바라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다. 나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면 그 바운더리를 단단히 정비해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성벽이 무너지면 약탈자들이 기승을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