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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y 15. 2022

당신의 오페라는 얼마 짜리인가요?

<페도라>, 프랑크푸르트 |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오페라 리뷰

1. '페도라(Fedora)'라고 해서 쟝 라신의 희곡 페드르(Phèdre), 즉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가 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임. 참고로 라신의 페드르는 이탈리아에서 '페드라(Fedra)'로 불린다고.


2. 오페라 <페도라>가 익숙한 건, 대학 시절 연습실에서 테너들이 그토록 불러댔던 아리아 "Amor ti vieta...(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금지한다오)" 덕분이다. 짧은데 선율이 참 좋은 곡이었다.

 https://youtu.be/pCLWyv-mn8I

도밍고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곡은 '역시...!'라는 생각이 든다. 깨알 같은 미렐라 프레니 등장


3. 작곡가 움베르토 죠르다노(1867-1948)에 대해서는 이미 대표작 <안드레아 셰니에> 덕분에 그만의 극적인 힘이나 음악적 흡입력을 알고 있었다. <페도라>도 그런 에너지가 기대됐다.

4. 이 오페라는 <안드레아 셰니에> 보다는 훨씬 적은 빈도로 공연된다. 그게 이번에 이 공연을 보러 온 두 번째 이유. 지금 안 보면 또 언제 볼 기회가 올려나.


  4-1. 자주 공연되지 않는 이유는 두 주인공의 러브라인이 와닿지 않는다는 게 한 몫하지 않을까. 음악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절절한데 "이 상황에서 쟤네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게 말이 됨?"이런 생각이 자꾸 든다는... (뭐...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하니, 그 어떤 논리가 필요할까 싶지만..)

그래서 주인공 테너가 등장하자마자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금지한다오"라는 불멸의 아리아를 부르나 보다. 작곡가가 깔아놓은 일종의 까방권. 


5. 첫 번째 이유는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Asmik Grigorian)이었다. 작년 바이로이트 개막공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나 그 전의 2018년 잘츠부르크의 <살로메>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화제가 됐던 그녀다. 언젠가는 실제로 꼭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페도라 중 마지막 두 공연을 소화한다고 한다. 완전 대박....!!! 어머... 이 공연 꼭 봐야 됨!!

https://youtu.be/tOe9Zc9oC9o

화제의 2018년 잘츠부르크 <살로메> 중 한 장면. 시원스러운 소리도 최고지만, 가장 나를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연기이다. 


  5-1. 아스믹 그리고리안이 이 프로덕션 캐스팅에 이름이 오르게 된 내막이 궁금해졌다. 원래 이 프로덕션은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Christof Loy)가 2016년에 스톡홀름 왕립 오페라에서 올렸던 것으로, 그때 아스믹이 주인공 페도라 역을 맡았다. 이 프로덕션이 프랑크푸르트에도 팔렸고, 코로나로 연기되는 바람에 이제야 공연된 것. 문제는 아스믹이 그 사이에 월드스타급으로 너무 빵 떠버렸다...!

6. 얼마 전에 프푸 오페라에서 메일을 받았다. 아스믹이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에 못 선다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지난주까지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루살카>를 노래했고 22일부터는 베를린에서 <예누파>를 노래한다. 그 사이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페도라>라니...!! 안 그래도 생뚱맞으면서도 참 빡센 스케줄이라고 생각했다. 루살카도, 예누파도 영혼을 갈아서 노래해야 할 만큼 치열한 역할인데, 페도라라는 역할도 앞의 두 역할보다 절대 가볍지 않다. 한 달 안에 이 세 가지 오페라를 한다는 건..... 그것도 타이틀 롤을.... 이런 스케줄을 강행한다는 것은 에이전시가 미친 거다.


  6-1. 결국 그녀는 취소했다. 건강하다가도 아플 것 같은 스케줄이다. 이해한다. 런던과 베를린 사이에 프랑크푸르트를 희생시킨 것도 이해한다. 프랑크푸르트가 유럽 금융의 수도이기는 해도, 어찌 런던과 베를린의 위상에 비할쏘냐....


7. 프푸가 아스믹 대타로 구해온 가수는 스베틀라나 악세노프다. 풍문으로는 엄청 잘한다는데... 과연? 프라하에서 경력을 많이 쌓았지만 확실히 아스믹 급은 아니다. 어디 봅시다.


  7-1. 스베틀라나, 미안해요. 선방하긴 했지만 아스믹하고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아요. 그녀에게 프푸 관객들은 따뜻한 환호를 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 아스믹이 생각났다. 아스믹이 출연한다고 대거 광고했던 프푸 오페라에게 원죄가 있다. 


  7-2. 아스믹이 출연하기는 했다. 이 작품에서 연출가는 영상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중에서 예전에 로이가 찍은 아스믹의 얼굴이 나왔다. 그래서 공연 전 극장 측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출연하니 당황하지 마시라"고 공지도 했다. 너네, 줄 것처럼 그랬다가 안 주는 거 얼마나 약 오르는지 알지? 덕분에 흥행은 성공했겠지만, 낚인 건 좀 섭섭하다. 


  7-3. 그러다가 반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내가 이 공연을 위해 지불한 티켓 값과 우리 집에서 프푸 오페라까지 가는 시간과 거리를 반추했다. 현재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아스믹의 공연을 보려면 가장 가까운 도시가.... 흠... 베를린, 바이로이트까지 가야 한다. (서울-부산보다 훨씬 멀다.) 그곳 티켓값은 최소 두 배 이상이다. 그리고 교통비, 숙소비.... 다 감안하면... 하아... 그래, 인정!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가격과 이 노고로 아스믹의 공연을 본다는 건 거의 복권 당첨에 해당하는 행운인 셈이다. 공짜 함부로 좋아하면 안된다. 제 때, 제 값을 치루지 않으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게 인생의 진리라고 알고 있다. 아스믹을 생각하니까 분했을 뿐, 사실 이 날 <페도라> 공연은 제 값을 충분히 했다. 


https://youtu.be/3usu1rjJez0

프랑크푸르트 <페도라> 트레일러, 여기에서 페도라 역할은 나디아 스테파노프가 맡았다.


8. 초연에서 전설의 테너, 카루소가 주인공을 맡았고 상대역은 소프라노 젬마 벨린쵸니가 맡았다고. 젊은 카루소를 두고 맞춤으로 쓰인 오페라라니! 그리고 벨린초니는 당시 드라마틱한 연기력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9. 살인과 치정 그리고 복수가 얽힌 사랑 이야기랄까. 막장드라마가 개연성 떨어지는 스토리를 펼쳐도, 욕하면서 보는 매력이 있듯이, 이 오페라도 죠르다노의 음악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1899년에 공연된 <페도라> 포스터


10. 1898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됐고, 이태리 작곡가가 썼으며 이태리 가수들이 노래했는데 왜 배경이 러시아였을까? 당시 이국적 풍광에 대한 유럽인들의 환상과 욕망을 반영한 것일까? 푸치니가 <나비부인>, <투란도트>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일까? 이 부분에 관한 궁금증은 언젠가 전혀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잡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 의식의 흐름은 이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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