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중 마지막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뢰>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도니제티는(Gaetano Donizetti) 영국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스코틀랜드의 문호 월터 스콧의 "래미무어의 신부"가 원작입니다. 그 외에도 이 위대한 벨칸토 작곡가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둘러싼 튜더 왕조 이야기로 무려 4편이나 오페라를 쓰기도 했죠.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는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르가모에 가면 도니제티의 생가가 남아있는데, 헛간인가...? 싶을 정도로 누추합니다. 채광도 형편없는, 그야말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도니제티는 두각을 나타내고, 20대에 이미 오페라 작곡가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30대에 들어선 도니제티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과 왕성한 영감을 바탕으로 명작들을 쏟아냅니다. 그의 30대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33세에 '여왕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자 그의 황금기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작품인 <안나 볼레나>(1830)가 나왔고요. 도니제티... 하면 딱 떠오르는 두 개의 대표 오페라인 <사랑의 묘약>(1832)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공연되지 않지만 19세기에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던 <루크레치아 보르자>(1833)도 잊어버리면 섭섭하죠.
대중적으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니제티의 30대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왕 3부작이라는 불리는 위대한 오페라 3편인데요. 위에 잠깐 언급한 <안나 볼레나>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고,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진 앤 볼레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앤 볼레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시대 스코틀랜드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드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가 바로 <마리아 스투아르다>(1834)이고요. 마지막으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말년을 다룬 <로베르토 드브뢰>(1837)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도니제티에게 꽤나 흥미로운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위의 여왕 3부작 이전에 <케닐워스의 성>(1829)이라는 오페라를 썼는데요. 젊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여왕 3부작에 꼽히지도 않고, 현재는 거의 공연되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답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를 보면 그가 그리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에 반하게 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권력을 수행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을 여러 차례 오페라의 소재로 등장시킨 것도 그렇고요. <사랑의 묘약> 속의 똑똑하고 주도적인 아디나도 매력적이죠. 심지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조차 정략결혼으로 결혼한 남편을 첫날밤에 '자신의 손으로' 찔러 죽입니다. 당시에는 꽤나 도발적이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작곡가는 '광기'이라는 요소를 차용했고요. 덕분에 '광란의 장면'이라는 초월적으로 아름다운 - 동시에 초월적으로 어려운 - 히트작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 점들이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도니제티의 오페라가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비결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아무튼 다시 여왕 3부작으로 돌아가서, 오늘은 그중의 세 번째 오페라인 <로베르토 드브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도다"라고 당당히 외치며 독신을 고집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생사를 넘나드는 우여곡절, 또 권좌에 오른 이후에도 수 없이 겪었던 대내외의 위협들을 생각하면 치세의 말년에는 권력 기반이 그나마 안정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백성들은 그녀를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로 칭송했고요. 그렇지만 높이 오를수록 외로워지는 것은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 가진 여왕은 행복했을까요?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도 같다."
고통이 제거되면 권태가 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자리는 권태롭다고 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죠.
말년의 엘리자베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다면, 그중의 하나는 에식스 백작인 로베르토 드브뢰였습니다. 실존 인물로 영국 이름은 로버트 드브뢰(Robert Devereux 1565-1601, Devereux가 프랑스 이름이라서 드브뢰라고 읽지만 누군가는 영어식(?)으로 '데버루'라고 읽기도 하고 '드베르', '데브뢰' 다양합니다. 정답을 아시는 분 댓글 남겨주세요!)입니다.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가 로버트 더들리(1532-1588)였던 덕분에, 그의 의붓아들이 되었는데요. 이 로버트 더들리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의 젊은 시절 염문설의 대상으로 흔히 레스터 백작이라고 불리죠. '여왕 3부작'에 꼽히지 못하는 비운의 오페라 <케닐워스의 성>이 바로 이 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 1세의 슬픈 사랑을 다룬 오페라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친부자는 아니지만, 부자가 모두 한 여왕의 총애를 받은 셈입니다.
그렇게 대를 이어 총애를 입었건만, 두 부자와 여왕의 결말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들인 로버트 드브뢰의 경우는 실제로 반란을 꾀하다가 사형당했죠. 이 사건을 두고 도니제티는 오페라를 썼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갈등을 부각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추가했고요. 여왕의 라이벌인 '사라'라는 역할인데요. 오페라 속에서 로베르토와 사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여왕은 로베르토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봉직하는 동안 사라를 노팅엄 공작과 결혼시켜버립니다. 그 와중에 로베르토는 독자적으로 반군과 휴전에 동의한 명목으로 런던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로베르토를 사면해주고자 하죠. 로베르토가 자신의 친구와도 같은 사라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오페라가 시작하면 사라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짧은 아리아를 부릅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울음조차도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는 것조차 금지당했기 때문이죠.
(All'afflitto è dolce il pianto)"
그러면서 그녀가 한 여인의 이름을 부릅니다.
"로자문다, 당신의 그토록 가혹했던 운명이 지금 나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오페라 초반에 사라는 로자문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는 자신의 상황에 감정이 이입되어 이 아리아를 부르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로자문다는 12세기의 영국 왕 헨리 2세의 정부였던 로자문드 클리포드(1150? - 1176?)를 말합니다. 12세기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하나로 꼽혔던 이 여인은 후세에는 '페어 로자몬드(Fair Rosamund)'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공정한', '옳은'이라는 뜻의 fair는 사실 '금발의', 흰 피부의'라는 뜻도 있고 옛날 영어에는 '아름다운, 어여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왕의 정부라는 부도덕한 오명 덕에 실제로는 그녀의 무덤이 파괴되고 외면되기도 했습니다만, 훗날 이렇게 좋은 형용사를 획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후세의 민중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그녀가 왕과 사랑에 빠져서 악독한 왕비에게 온갖 고문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로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괴롭힌 악녀로 거론되는 왕비는 12세기의 대표적인 여걸 '아키텐의 엘레노아'(1122-1204)입니다. 실제로 헨리 2세와 엘레노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그 덕에 그 사이의 아들들도 아버지를 배신하는 등 스토리가 첩첩산중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로자문드의 죽음과 엘레노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중론입니다.
하지만 마치 아름다운 백설공주가 악독한 왕비의 독에 죽었다는 동화처럼 영국에서는,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는 아름다운 로자문드가 엘레노아 왕비 때문에 독이 든 와인을 마셔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그러니 도니제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뢰> 속에서 사라가 로자문드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은 꽤나 실제 역사에 부합한 고증인 셈이죠.
게다가.... 심지어 도니제티는 <영국의 로스몬다 (Rosmonda d'Inghilterra)>라는 로자몬드와 헨리 2세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를 <로베르토 드브뢰>를 쓰기 3년 전에 이미 피렌체에서 올린 바 있었습니다. 물론 이 오페라도 현재는 거의 공연되지 않습니다.... 뭔가 도니제티 머릿속 의식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 한 많은 여인 로자몬드를 그린 그림을 몇 점 소개할게요.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뢰>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두고 억지로 결혼한 후,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채 홀로 삭혀야 했던 사라는 로자문드의 이야기를 읽고 감정을 토로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오페라를 참 좋아해서 오페라 속 테너(로베르토)와의 2중창이나 바리톤(노팅엄 공작)과의 2중창을 즐겨 연주했었는데요. 이번에 처음으로 사라의 아리아에 도전해봤습니다. 그녀의 애절한 노래를 아래에 소개할게요.
1837년 10월 29일,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뢰>가 초연됐습니다. 하지만 그 해 6월 13일에 28세의 나이로 도니제티의 아내가 셋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그만 사망했죠. 사실, 이 시기는 도니제티에게 무척 혹독했던 시기였습니다. 이전 해에 이미 부모님과 둘째 아이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그런 슬픔을 딛고 도니제티는 이 오페라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이 극적인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서정적이고 슬픔을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이 사라의 아리아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 도니제티의 심정이 가장 많이 반영된 부분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도니제티의 30대는 가족의 상실이라는 큰 아픔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에 진입한 도니제티는 프랑스로도 활동 영역을 넓힙니다. <연대의 아가씨>(1840), <샤무니의 린다>(1842), <돈 파스콸레>(1843) 등 명작이 탄생했죠. 그렇지만 그의 40대의 후반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훗날 기회가 될 때 다시 이어가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