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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Jul 01. 2022

파격의 벨칸토 오페라는 관객을 동요시키고...

볼로냐 |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자>

아래 오페라 리뷰는 '월간 객석' 2022년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늘 저의 거친 졸필을 매끄럽게 다듬어주시는 객석 편집팀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이탈리아 볼로냐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도시답게 거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으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도시의 열기는 꺼지지 않았다. ‘젊다’, 혹은 ‘혁신적이다’라는 형용사는  '볼로냐 극장'(Teatro comunale di Bologna)에서도 느낄 수 있다.  1763년에 문을 연 극장의 로비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베르디와 함께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부조가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1871년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이탈리아에서는 최초로 이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로,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들 또한 볼로냐라는 관문을 통해 이탈리아로 진출했다. 토스카니니, 첼리비다케 등이 거쳐간 음악감독 자리에는 옥사나 리니우(1978~ )가 임명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사에 최초의 여성 지휘자라는 한 획을 그은 그녀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올해 1월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 (사진 제공: Michele Lapini / Teatro Comunale di Bologna)

이렇게 새로운 시도에 과감한 볼로냐에서 도니제티의 사랑받는 오페라 레퍼토리인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 새로운 프로덕션이 지난 5월에 선보였다. 이 벨칸토 오페라는 1833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됐고, 볼로냐에는 1841년에 상륙했지만 19세기 내내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1984년에 카티아 리치아렐리(1946~ ), 2001년에 마리엘라 데비아(1948~ ) 등 시대를 풍미한 스타 소프라노들이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며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번 개막공연에서도 타이틀 롤을 노래한 올가 페레티야코(1980~ )가 첫 번째 아리아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부르고 나서 관객들의 열광적인 함성과 함께 기나긴 갈채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타이틀 롤을 노래한 소프라노 올카 페레티야코


역사에 더한 상상력, 연출로 설득하기

볼로냐만의 분위기는 파격적인 연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서곡이 시작되면 어린 소녀가 무대에 등장하고 아빠에게 빨간 망토를 선물 받는다. 하지만 자상했던 아빠는 곧 늑대의 탈을 쓰고 소녀를 덮친다. 도입부에서는 암시만 했지만 극 중 루크레치아가 괴로워하며 회상하는 장면에서 배가 부른 소녀가 등장함으로써 근친상간이라는 충격적 설정에 쐐기를 박는다. (물론 펠리체 로마니가 쓴 대본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저 연출가 실비아 파올리의 상상력에서 나온 도발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실제 역사 속의 인물이다. 이 여인을 둘러싼 온갖 역사적인 사료에서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연출자의 설정보다 더 자극적이다. 심지어 오페라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 희곡 <루크레치아 보르자>(1832)에서는 루크레치아가 자신의 친오빠 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제나로)과 사랑에 빠진다고 설정되었다.


거론하기조차 남사스럽고, 상류층의 치정에 불과한 듯한 이야기 배경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루크레치아'라는 여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오페라 절반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발적이면서도 논란을 불러일으킨 실비아 파올리의 이번 연출도 루크레치아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인물 루크레치아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1480-1519)는 가문의 권력을 위한 도구였고, 또한 희생자였다. 부친인 교황 알레산드로 7세에게 있어서 그녀는 권력다툼의 체스판에서 하나의 말일뿐이었다. 흩날리는 금발로 유명했고 또 아름다웠던 그녀는 효용성이 높은 수단이었다. 그녀의 첫 정략결혼은 불과 12세 때 벌어진 일이었으며, 가문의 영광을 위해 무려 세 번이나 결혼해야 했다. 첫 번째 남편은 교황의 협박 아래 굴욕적으로 이혼당했고, 두 번째 남편은 오빠인 체자레 보르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남편이 바로 오페라 속에서 루크레치아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페라라 공작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그녀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결혼 사이에 사생아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아이의 부친으로는 집안의 하인이었고 결국 암살되었던 '페드론 칼드론'부터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까지도 거론됐다. 빅토르 위고의 희곡은 역사적 사실에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저주받은 어머니'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상력을 덧입힌 셈이다. 

바르톨로메오 베네토가 1520년 경에 그린 <플로라 (봄의 여신)>,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이 그림이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초상화라고 여겨졌다.

주인공 루크레치아에게 까다로운 성악적 난이도를 요구하는 이 오페라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벨칸토 오페라 재발견 붐에 의해 새롭게 부각됐다. 몽세라 까바예(1933-2018)나 조안 서덜란드(1926-2010)와 같은 명가수들의 음원과 공연물이 지금도 스탠더드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그동안 루크레치아는 여왕과도 같은 위엄은 가지고 있으나 모진 운명 속에서 오명을 뒤집어쓴,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올가 페레티야코가 구현한 루크레치아는 주도적인 팜므파탈의 모습을 보여줬고, 고정관념을 벗어난 주인공을 보여주고자 한 실비아 파올리의 연출 설정은 악녀 루크레치아의 복수에 개연성을 부여했다. 


(살짝 언급된 몽세라 까바예가 궁금하시다면...)

https://brunch.co.kr/@jinaohmezzo/197


'악을 길들일 수 있다'는 오해

파올리는 인터뷰에서 193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즘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무대는 당시의 지하감옥과 고문실을 연상시켰다. 감옥에 갇힌 이들은 매우 가혹하게 다뤄졌고, 그들의 탈출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특히 페라라 공작 알폰소가 첫 아리아 “오라, 나의 복수여”를 부르는 동안 무대에서 벌어지는 여성 포로들에 대한 잔인하고도 선정적인 가혹 행위는 관객들의 큰 분노를 샀다. 아리아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의 “망신스럽다!(Che vergogna!)”라는 고함이 사방에서 한참 동안이나 울려 퍼졌다. 독일이었다면 커튼콜까지 기다렸다가 야유를 보냈을 텐데, 역시 이탈리아 관객은 호불호 표현에 주저함이 없었다. 


문제의 페라라 공작 알폰소의 아리아 씬


연출자는 무대 위 감옥을 도살장으로 표현했고, 실제로 곳곳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그녀는 이곳이 "주인공들의 일그러진 감정들의 상징이기도 하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연출은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무위에 그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루크레치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이 성장하고, 또 자신을 이용한 남자들의 세계인 보르자 가문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터득한 방법(독살)으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6명에게 복수했지만, 그중에 사랑하는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연출자는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악을 길들일 수 있고, 또 그것을 이용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환상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오해와 배신, 그리고 죽음의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다.”


배우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연출자 실비아 파올리는 저명한 연출가인 다미아노 미키엘렛토의 조감독으로 많은 경험을 쌓고 2014년 테네리페에서 <라 체네렌톨라>로 연출가 데뷔를 했다. 차기작으로는 인스부르크에서 보논치니의 <아스타르토>와 낭시에서 <토스카>가 예정되어 있다. 논란은 있지만 파올리가 다음이 궁금해지는 연출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번 볼로냐에서 올가 페레티야코를 비롯한 슈테판 폽(제나로 역), 라미아 뵈그(오르시니 역) 등 출중한 성악진과 이브 아벨이 지휘한 오케스트라의 안정된 연주 덕을 봤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도 말이다. 


연출가/배우 실비아 파올리 (사진 제공: Ilaria Costanzo 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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