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가져가라 ΜΟΛΟΝ ΛΑΒΕ
기원 전 8세기경에,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민족이 그리스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내려왔다. 그리고 정착한 곳의 이름을 그때 여왕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라 하였다.
스파르타의 인구가 만명이 되었을때 쯤, 더 많은 음식을 찾아 스파르타 아래 비옥한 땅 메시니아를 쳐들어가 정복하는데 당시 메시니아 인구는 십만이었다.
이때부터 만명이 십만을 노예로 만들어 이들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 만명은 어릴때부터 살인 병기로 교육받으며 자라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요상하고 무서운 전설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그 전설의 나라 여행기 2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인들에게 대패한 페르시아는 10년 동안 군대를 재정비해 무려 도합 25만의 육군과 해군을 끌고 그리스를 다시 쳐들어온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그동안 몇 천명 규모의 전쟁 밖에 해본 적이 없어서, 25만이 대체 얼마인가를 설명하려면
"저들이 활을 쏘면 태양을 가립니다"
라고 설명해야 했는데, 그에 대한 스파르타인의 대답은,
"그럼 그늘 아래에서 싸우니 좋겠군"
페르시아는 25만을 데려왔는데 그리스는 스파르타에서 300명, 다른 그리스 연합군을 합쳐도 7000명이 안되는 숫자로 나왔다. 그래서 전쟁 장소는 폭 1.5m의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결정된다. 대군이 활약할 수 없는 장소
이때 그리스인들은 델피에서
'바람이 그리스를 돕는다'라는 아폴로 신탁을 들었다. 정말로 다음 날 폭풍이 불어 페르시아 전함 200척이 난파하고 당황한 페르시아 대왕은 육지쪽으로 정찰대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전쟁보다 평상시 훈련이 더 빡세서 전쟁은 오히려 휴식시간 같았던 스파르타 전사들은 머리를 빗고 몸에 기름칠을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이쯤에서 무기를 놓고 땅과 물을 바치면 제국의 친구가 될 것 이라는 페르시아의 제안에도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는
"ΜΟΛΟΝ ΛΑΒΕ(몰론 라베) "
( 와서 가져라가라)
라는 존나 까리한 대답까지 내놓는다.
*테르모필레(Thermopylae)
'뜨거운 문'이라는 뜻이다. 'Thermo' 는 Thermometer(온도계) 라는 영단어에서 쓰이는 그 thermo, 'Pylae'는 '문'이라는 그리스어로 아크로폴리스 정문의 이름이 프로필라이.
이 지대는 고대부터 유황이 끓었던 곳으로, 진짜 뜨거웠던 곳이라 '열문', 즉 '테르모필레'로 불렸고 여기서 나오던 유황 연기는 델피 아폴로 신탁의 비밀이기도 하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델피에 관해 쓸 때! 지금도 이 곳을 가면 길에 유황 온천이 흐르는 걸 볼 수 있다.
이들이 지키는 테르모필레는 도저히 뚫리지가 않아서 불사조라고 불리는 페르시아 대왕의 친위대까지 투입되지만 이 친위대마저도 스파르타 전사들에게 거의 난도질을 당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배신자 때문에 뒷 길이 뚫려서 테르모필레를 지키던 스파르타인들은 모두 죽는다.
뒷 길이 뚫렸다는 소식에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군은 이 곳에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고 다음 전쟁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고, 그 곳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싸우다 죽은 스파르타 300명이 후일 영화 주인공 300명이 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이기려고 나간 전투가 아니라 고린도 평원에 모든 그리스 군대가 모여 총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전투였다. 죽을 걸 알고 나간 스파르타 특공대였다. 그래서 레오니다스는 아들이 있는 자들로만 300명 골라서 데려갔다.
여기서 죽더라도 우리의 자식이 대를 이어 우리의 이야기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즉, 스파르타 300명은 모두 스파르타의 아버지 300명이었다.
실제로 그 동안 아테네는 해전을 성공적으로 준비해냈고, 다음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거의 다 박살낸다. 이게 바로 살라미스 해전!
승리의 비결은 날렵한 배를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였던 것. 이 때 배의 갑판 아래에서 열심히 노를 저었던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 승리의 일등 공신들이 되었고, 아테네가 이 시민들의 활약상과 발언권을 인정해주면서 아테네에는 최초의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있었던 그리스vs 페르시아,
페르시아 전쟁은 역사상 서양과 동양이 맞붙었던 최초의 전쟁이고, 페르시아 전쟁의 첫 번째 전투인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인들이 거둔 승리는 서구라는 실체가 태어나면서 낸 울음소리 라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이때 그리스가 졌더라면, 페르시아 제국은 현재의 유럽 대륙으로 밀고 들어왔을거고, 그 당시만해도 유럽에는 페르시아에 대적할만한 변변찮은 국가가 없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동양 문명아래 살고 있을지도?
그나저나 그리스가 이겼는데 왜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르는 걸까
무려 3년을 그리스의 가이드로,
페르시아 전쟁을 열심히 설명해왔는데
정작 스파르타에는 이제서야 처음 방문했다.
지금의 스파르타는 작고 조용한 동네였지만
그 곳에 서있는 레오니다스와 여전히 잘 자라는 올리브 나무들을 본 걸로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현재 스파르타 마을의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