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어디까지 배고파봤는가?
2016년 7월 어느 날 저녁, 눈을 떠보니 난 싱가포르의 차이나 타운 구석진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고, 집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보다 두 시간이 더 지나있었다.
때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정말 해외에서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싱가포르로 온 지 약 두 달쯤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많지는 않았지만 용돈을 받아썼고,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그 안에서 최대한 아껴 쓰며 살아왔었다. 교육과를 나왔었기 때문에 주로 과외나 학원, 방과 후 교사 같은 시간 대비 소득이 꽤 높은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서 카페, 식당이나 판매 등 손님을 직접 맞는 서비스업의 경험이 거의 전무했었다. 그런 내가 영어와 그 나라 문화를 제일 먼저 배울 수 있는 건 사람을 계속 만나 말을 해야 하는 세일즈라는 생각에 덜컥 세일즈 분야를 선택해 한국도 아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싱가포르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학교와 연결되었었던 잡 에이전시에서 알려준 월급은 싱가포르 달러로 약 1400 불, 즉 한국 돈으로 110만 원 남짓되는 월급이었다. 사실 난 그냥 단순히 100만 원 정도 월급에 해외생활이라는 경험도 쌓고, 언어도 배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착각)했었다. 대학 시절 내내 자취경험을 기반으로 평소처럼 아껴 쓰면 물가가 아무리 비싼 싱가포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얼마나 순진하고 가엾은 생각인지는 싱가포르에 한 달만 살아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올라오는 잡 에이전시들의 공고를 봐도 저 정도의 급여를 받는 직업들을 소개해주고, 월급보다 더 많은 에이전시 비용을 내라고 요구하는 곳이 널려 있다. 내가 첫 직장을 구했던 시점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등짝을 때려주고 싶다. 내 등짝 한번, 에이전시 등짝도 한번.
싱가포르에서 나의 첫 직장은 영국계 리테일 회사였다. 다루는 물품들은 유아동 및 산모용품이었는데, 내 포지션은 브랜드의 싱가포르 최대 플래그십 스토어의 세일즈 담당이었다. (취업을 하게 된 경로와 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은 다른 글에서 담을 예정이다.) 이름은 참 번지르했는데 요구했던 업무는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내가 일했던 곳은 한국을 예로 들자면 이마트나 롯데마트처럼 큰 매장인데 다루는 제품이 오직 산모와 유아동 용품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물론 크기가 실제로 그만큼 큰 건 아니지만 처음 일하러 갔을 때의 느낌은 그것과 거의 동일하게 느낄 만큼 꽤 컸었다. 실제로 쇼핑몰의 한 벽면 전체가 내가 일했던 매장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쓰고 특별한 정보 없이도 구매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생활용품이 아닌 산모와 유아를 위한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고객들도 정보를 잘 몰라서 정말 깊은 조언을 필요로 했다. 특히 임산부, 신생아처럼 민감한 대상을 타깃으로 한 제품에 대해서는 고객들이 정말 세세하게 질문을 많이 했다. 불행히도 내가 일을 시작했던 달에 싱가포르 전체의 세일 기간이라 트레이닝을 받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업무에 바로 투입됐었다. 아무 지식이 없어서 매일 밤 울면서 유튜브와 브랜드 잡지를 보며 관련 지식과 제품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매일 들어오는 재고는 어찌 그리 많은지 몇백 개가 되는 옷과 기타 제품들의 포장을 벗기고 다시 회사 규정에 맞게 디스플레이하고, 각종 제품들의 재고량과 브랜드에 따라 매주 진열을 바꿔야 했다. 물론 진열을 바꾸기 위해서 나무 선반과 철로 된 받침대, 각종 무거운 도구들을 항상 바구니에 넣어 들고 다녀야 했다. (당시 일했던 이야기는 정말 정말 많지만, 하나의 글에 다 담을 수 없기에 앞으로 차근차근 다룰 것이다.) 아무튼 내가 상상했던 한산한 매장에서 손님들과 얘기하고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차근차근 언어와 일을 배워가겠다는 기대가 처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첫날에 일하고 나서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느라 한참을 집 밖에서 서성이다가 들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분야를 고를 때 아르바이트나 인턴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고 그걸 커리어로 고르는 것은 정말 복권을 긁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아무 연고도,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해외에서 첫 사회생활이라면.
처음 일을 시작할 당시 영어로 그 질문들을 다 이해하고 설명하고 제품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과 처음 해외생활의 새로움 그리고 박봉까지 겹쳐서 삼주만에 살이 거의 사 킬로그램이 빠져서 처음 일할 때 입으려고 샀던 바지가 허리띠를 메도 너무 꾸깃해져 보기 싫을 정도로 핼쑥해졌었다. 그 당시에 에이전시에서 소개해준 집은 월세가 650불이었다. 심지어 원래 1300불(약 100만 원) 정도였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내 사정을 알고 한 달 살 동안은 반값으로 해주셔서 저 가격이 된 것이다. 참고로 내 수습기간 3개월의 월급은 $1425불이었으니 월급 전체에서 십만 원 제외한 금액을 매달 월세로 내야 하는 고급 콘도의 홈스테이 하우스에서는 절대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저 때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내가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불안해할 때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라 감사하다. 그런데 집값이 반값이 되면 뭐하나 내 월급은 백만 원.. 집값을 빼면 내 손에 남는 건 60만 원 남짓인데 처음 가서 필요한 생필품들과 교통비, 휴대폰 개통 그리고 육체노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양분을 위한 식비까지.. 그런데 다행히 처음 살았던 그 집은 학생들이 주로 사는 홈스테이 하우스여서 나는 월세도 반밖에 내지 않지만 식비를 아끼려고 염치없이 아침저녁으로 차려진 밥을 먹고, 항상 거실에 있는 식빵에 잼을 발라먹으며 버텼다. 이건 대학 다닐 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밥을 해 먹고 도란도란 지내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너무 외롭고 배고프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는, 해외에 나와있지만 딱히 특별히 뭔가를 더 즐길 수도 없는 무력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저 급여로는 정말 택도 없을 거라는 걸 나만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한 달간 버티다가 그 집이 직장과 거리도 너무 멀고 월세도 내 월급과 맞먹었기에 차이나 타운의 한 호스텔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예전에 기숙사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작은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가 있는 우리나라 투룸 느낌의 작은 집이었다. 난 그곳에서 월 450불을 내고 나 이외에 말레이시안, 필리피노, 한국인 언니 이렇게 3명과 한 방을 함께 썼다. 집주인의 말에 의하면 방을 빌린 게 아니라 그냥 이층 침대 한 칸을 빌린 셈이다. 그렇게 통근시간도 훨씬 가까워지고 월세도 이백 불이나 줄었지만 보증금, 기본 생필품, 길을 잃었을 때 지각을 면하기 위한 택시비 등 여전히 초기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많았고, 여전히 난 생활고에 허덕였다. 그렇게 생각한 방법이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 필요한 비용이 있는데, 조사에 따르면 소득이 적어질수록 식비에 투자를 덜 하게 된다고 한다. 아마도 최소한의 영양을 유지하는 정도로 참으면 가장 많이 차이를 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말이 맞긴 했다. 난 보증금(싱가포르는 주로 한 달 월세만큼을 보증금으로 내야 한다.)과 월세까지 내고 남은 돈으로 1일 1식 혹은 한 끼를 두 개로 쪼개서 먹으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주쯤이 다되었을까 몸에 힘이 너무 없었다. 그때는 이미 넋이 나간 상태로 이 곳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바빴기 때문에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이 그냥 집에 가면 바로 피곤에 찌들어 잠들기 일쑤였다. 설상가상 생리하는 날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생리통이 매우 심해서 링거로 진통제를 맞거나 심하면 기절해서 응급실에 간 적도 몇 번 있다. 그렇게 영양실조, 스트레스와 생리통이 겹쳐 난 오전 교대 근무를 마치고 이른 오후 집에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노을을 보며 쓰러졌던 것이다. 생리주기가 다가올 때는 남들보다 훨씬 음식과 몸상태를 신경 써야 하는데 건강한 사람들도 버티기 힘든 환경에서 음식도 잘 챙겨 먹지 못하니 이 사단이 날 수밖에. 날 더 슬프게 했던 건 그때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았고, 결국 혼자 일어나서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해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때의 사건은 일 년이 지날 때까지 그 당시 같이 방을 썼던 룸메이트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특히 가족에겐 절대 말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서러워서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묻는다. 해외에서 일하는 데 뭐가 걱정이고, 돈을 적게 벌어도 젊으니까 경험 삼아 2-3년만 버티라고. 그리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싱가포르 여행에 관한 미디어 자료 혹은 잡 에이전시에 싱가포르 취업을 홍보할 때 보이는 마리나 베이의 화려한 야경과 멀라이언, 인종차별이 없는 영어를 쓰는 아시아 국가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들 취업만 하면 한국에서와 확연히 다른 삶을 살거라 기대하는 듯하다. 물론 내가 현실을 너무 모르고 막연한 꿈만을 그리며 온 것도 사실이다. 근데 모르고 온다고 해서 이런 일들을 누구나 겪어야 하고, 나의 피 같은 돈과 젊음을 값싸게 팔아버린 에이전시가 옳다는 건 아니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나의 싱가포르 생존기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사실 내가 너무 싱가포르 취업이 간절했을 때, 그리고 실제로 취업을 하고 너무 힘들었을 때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뜨는 이야기들은 거의 취업했던 방법 혹은 멋지게 성공해서 즐기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도 결국 이직에 성공했고, 위로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의 반대편엔 고민과 어려움들에 부딪히고 있지만 터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청춘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힘들어도 끝까지 참고 버티면 결국 잘 될 거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인생은 정말 길다. 청소년 시절을 모두 쏟아부어 그토록 바라던 ‘대학 입학'이라는 미션을 클리어해도 그게 끝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 어쩌면 시작일 뿐이다. ‘해외 취업'도 마찬가지다. 취업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는 결국 자신 스스로 고민해나가야 한다. 해외취업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내가 이루어가고 싶은 꿈 나의 인생의 과정의 한 부분이다.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방향을 설정해야 하고 ,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은 그냥 ‘해외 취업’이라는 어떤 미션을 클리어한다고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와 똑같이 해외에서 일하는 것도 어쩌면 내가 매일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다. 일상이 반복되고 한계에 부딪힐 때쯤엔 단순히 해외에 취업에 성공했다는 게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물론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새로운 기회나 네트워크가 생길 기회가 많지만 그것 또한 가만히 주어진 일만 한다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너무 부정적인 견해를 많이 쓴 것 같기도 하지만, 해외취업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으로 출발하는 첫 번째 관문이자 실제로 살아내야 할 현실이다. 지금도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누군가와, 해외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직장인들 모두 힘내라고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