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한국에서도 파티를 꽤 쉽게 접할 수 있고, 예전보다 익숙한 문화가 되었지만 직장에서는 회식, 야유회 외에 파티를 하는 곳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 곳 싱가포르에선 회식문화가 없는 대신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주로 연말이나 연초에 Dinner and Dance , 줄여서 송년회 겸 새해맞이 D&D라고 하는 파티를 한다. 매달 하는 회식을 모으고 모아 한방에 터뜨리듯이 회사에서는 전 직원을 위해 디앤디를 매우 크게 주최한다.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좋은 소식이었다.
주로 디앤디의 날짜가 몇 달 전에 정해지면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디앤디의 테마를 알려준다. 그럼 그 테마 안에서 각 부서별로 드레스코드를 정해서 개인적으로 혹은 팀이 같이 디앤디를 위한 복장을 준비한다. 그때 우리 회사 디앤디의 드레스코드는 각국의 전통복장이었다. 우리 부서는 그중에 중국 전통 복장을 입기로 결정해서 팀 내의 중국인 친구들이 온라인 공동구매를 진행했지만 결국 배송과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주문에 실패하고 중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빨간색' 복장을 입기로 했다. 실제로 중국에서 빨간색은 번영, 행운 등을 의미하기에 새해가 다가오면 온 거리와 매장 디스플레이들은 붉은색 테마로 바뀐다.
중국에서 온 직원들은 다들 치파오나 개량 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동료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서로 어떤 빨간색 옷을 입고 갈 건지, 상의를 빨간색으로 할 건지 액세서리를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줄지 들떠서 매일 얘기를 나누었다. 결국 나는 부기스에 가서 어두운 붉은색 상의를 사서 입고 갔다.
준비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에는 포토존이 마려되어 있어서 팀을 넘어서서 함께 사진을 원 없이 찍었다. 한복을 테마로 정해 한복을 입고 온 직원들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건 하와이안 스타일과 인도 전통복장을 입은 팀이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난 그 팀이 앉은 테이블을 계속 곁눈질하며 부러운 눈빛을 보냈었다.
회사 디앤디는 전 부서 사람들이 모여서 하기 때문에 주로 호텔에서 공간을 빌렸다. 그리고 협력하는 회사의 임원들과 명예직원 등등 거의 모든 관계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가 일했던 매장은 회사 내에서 제일 큰 팀이었기 때문에 테이블을 앉을 때 제비뽑기를 해서 여러 테이블에 걸쳐 랜덤으로 앉게 되었다. 나는 어차피 누구랑 앉아도 낯을 안 가리고 회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한국인이어서 나라나 인종별로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에 크게 신경을 안 썼다. 결국 난 우리 팀만 있는 테이블에 배정되어 편하게 즐겼지만 같은 팀의 친한 친구 한 명은 혼자 다른 부서가 있는 테이블로 배정이 돼서 즐기는 자리인 디앤디에서도 내내 불편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국적에 상관없이 개인의 성향에 따라 파티가 즐거울 수도 가시방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서있는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우리 팀의 필리피노 동료이다. 직접 차이나 타운에 가서 모자와 변발 가발까지 세트로 사서 오는 정성을 보였다. 결국 그 친구는 베스트 드레서로 상까지 받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섹시하고 멋진 치파오 하나 사 입고 갈걸 하고 잠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디앤디의 순서는 보스의 짧은 소감 전달, 다 같이 춤추고 맛있는 코스요리 먹기, 그리고 장기자랑 및 퀴즈 쇼 등등 특별하지는 않았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시상을 하고 받을 때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서로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디앤디를 하는 순간에는 ‘아 내가 외국에서 일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순서 중의 하나는 사자춤이었다. 사람들이 사자탈 속에 들어가서 모형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 것이다. 세명이 어깨 위에 올라타 춤을 출 때는 정말 사자가 일어나 포효하는 느낌이 났다. 영국 회사이긴 하지만 보스가 중국계 싱가 포리언인 싱가포르 브랜치이고, 디앤디를 했던 시기가 새해가 조금 지난 2월이었기 이러한 순서를 넣은 듯했다.
그리고 순서 내내 호텔에서 코스요리를 제공해주었다.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바로 마지막 요리인 ‘Yu Sheng ’라는 새해맞이 음식이다. 이 음식은 색색의 재료마다 번영, 행운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Huat Ah!(직역하면 번창하세요! 한국어로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이해하면 된다)’라고 외치며 다 함께 젓가락으로 접시에 있는 모든 재료를 섞는다. 그 순간에는 음악소리와 사람들이 새해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새해에 차이니즈 싱가 포리언들의 전통인 Yu Sheng 섞으며 축하하기. 높이 들어 올려 섞을수록 복이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웃기고도 슬픈 에피소드가 있었다.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어시스턴트 매니저만 참여를 못했었는데 그 이유는 예비군 훈련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매년 디앤디를 매우 기대하고 항상 드레스코드에 매우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못 가서 너무 아쉬워하길래 다 같이 춤추는 시간에 동료들이랑 같이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중계를 해줬다. 부러워하는 그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순서가 끝난 이후에는 경품 추첨을 했다. 나는 바보같이 경품번호표를 회사에 두고 와서 내 번호가 불리는 일은 없었다. 이런 것에 운이 항상 없었기 때문에 별로 후회는 하지 않았다. 바로 내 옆에 앉았던 동료가 500불 상당의 상품권을 받기 전까지는 하하. 저녁시간을 하루 종일 회사 전체와 보내는 일 년의 처음이자 마지막 디앤디였다. 지금은 이직을 해서 작년과 같이 이런 시간을 보내진 못했지만, 전 직장 동료들에게 듣은 바로는 올해 디앤디는 작년보다 규모도 작고 재미가 없었다고 나에게 운이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나에게도 이 디앤디는 첫 직장이자 첫 해외생활로 고생하며 보낸 지난 시간을 잠시 잊고, 열심히 일한 보상을 받듯이 동료들과 다 함께 즐길 수 있었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