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소마(Midsommar, 2019)> 읽기
마치 올 여름에 단 한 편의 영화만 개봉한 것처럼, 절대 가볍지 않은 존재감으로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영화가 있다. <문라이트(Moonlight, 2016)>,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 2017)>,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an, 2018)> 같은 최근의 잘 만들어진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들을 제작, 배급한 ‘a24’ 영화사가 제작하고, <유전(Hereditary, 2018)>이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설정으로 우리를 얼어붙게 했던(칭찬이다) 아리 애스터가 연출한 <미드소마(Midsommar, 2019)>이다. 90년에 한 번 씩, 9일 동안 지속되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꽃과 쨍한 햇빛 속에 펼쳐지는 지옥. 당신은 벌써 초대되었다!! 고. 하지만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유 선생은 이 영화를 올여름 당신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 중 한 편으로 추천하겠다. 90년에 한 번 씩은 아니지만, 쉽게 나오지 않는 영화인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의 반응은 보장하지 못한다. 몇 명은 얼어붙을 것이고, 몇 명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몇 명은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런 감흥도 느낌도 없이 극장 밖을 나갈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분명히 쉽지 않다. 이야기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지금 보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영화는 장르의 규칙을 거스르면서(이 말도 이젠 상투어가 다 되었다. 장르의 규칙은 깨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장르의 영화를 보고 있는 지를 잊게 만든다. 장르의 규칙이라는 말 대신에 장르의 중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떨까. 장르의 중력은 그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영화를 움직이게 한다. 장르의 중력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영화는 이제 다른 영화가 되어, 다른 장르의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장르의 중력에도 영향받지 않는 무중력 공간의 영화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튼, 이 영화는 공포 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고 푸르고, 고어 영화라 하기에는 굳이 배를 갈라 내장 비만을 확인하는 살인마가 없고, 청춘물이라고 하기에는 커플이 서로에게 너무 무심하고 충격적인 그룹섹스라니. (그룹섹스 말이 너무 세긴 하지만, 보면 안다. 이 장면에서 모두들 웃었다. 당신이 남몰래 그동안 어떤 포르노를 즐겨왔다 하더라도 이런 장면은 처음 봤을 것이다. 그룹섹스... 장면에서 웃어보기는 오랜만,.. 처음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자 일제히 터져 나오던 탄식. 내 멘탈 돌려다오,라고 말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콜라 속의 남은 얼음을 깨 먹으며 다소 어렵지만, 몇 가지 키워드로 이 영화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도대체 이 영화 뭘까?
그림의 차가움
이 영화엔 그림들이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전공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의 집에는 그림이 많이 걸려있다. 여주인공의 인테리어 기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소 직설적이다. 그림이 영화 전체 내용을 암시한다면, 그 암시는 너무 직접적이고 요약적이어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당연히 그림이 영화 내용을 암시하고 있겠지, 그런 건 하나마나한 소리다(유튜브에 올라온 <미드소마의 결말 해석> 류의 영상이 그런데 죄다 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영화 내에서 이러한 그림의 돌출은 암시라기보다는 명시인데, 재미있지는 않고 다소 진부하다. 그래서 이 영화엔 내용을 암시하는 그림들이 배치되고 있다는 설명은 평면적이거나 불충분하다.
이 영화는 영화 전체가 여러 장의 그림을 이어 붙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구성되어 있고, 사찰의 심우도처럼 연출되어 있다. 아니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몇 장면의 특정한 순간들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그림들은 그래서 영화 내용에 대한 암시라기보다는 형식에 대한 암시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렵게 쓴다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영화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원시적 믿음은 야만적이고 맹목적인데, 우리라고 뭐 다를 것 있냐는 자조 혹은 풍자가 영화 전편에 흐르고 있다. 기독교적 유일신이 아니라 자연과 순환과 정령을 믿는, 자연주의 힐링캠프적 신흥 종교 냄새를 물씬 풍기는 설정으로, 그 풍자의 날카로움을 살짝 숨겨 놓았을 뿐이다. 하기야 만약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적 설정이 요만큼이라도 들어갔다면, 이 영화는 필름 채 창고에 갇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 동어반복 아닌가? 우리의 현대 종교 역시 저들의 원시 종교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어린양과 사자들이 함께 뒹굴며 살아가는 천국의 모습은 아직 복음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이에게는 기괴한 이방인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방인의식 이후의 행동 양식은 둘 중 하나다. 어서 복음의 세례를 받아 그 천국 속의 일원이 되거나, 어서 빨리 그곳을 떠나거나. 보리수나무 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깨달음을 설파하는 부처님 주변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저 간단한 깨달음이 나에게는 없단 말인가. 혀를 뽑고, 창자를 돌려 빼내는 지옥도를 볼 때마다 어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부처님께 귀의하던가, 아니면 어서 빨리 그곳을 떠나던가.
<미드소마>는 한 작은 종교 집단의 맹목적 믿음을 통해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형태의 신념 체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회화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 회화 내부의 등장인물이 회화 자체를 바라볼 수 없다. 회화는 언제나 외부의 관찰자가 그가 지니고 있는 바깥의 인식을 회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형태로서만 존재하는 예술이다. <미드소마>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벽화(로마 대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연상하게 하는) 역시 등장인물들의 삶을 단순화하여 보여주면서, 동시에 종교라는 ‘회화’에 갇힌 저 흰옷의 호르간(호르가 사람들)들을 보여주는 비유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인으로서 우리는 호르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 영화는 이러한 우리들의 종교를, 종교적 예술 양식의 하나인 성화(聖畫)라는 형태로 되비쳐 준 것이다. 누군가 독실한 종교인인데 이 영화를 종교라는 장르의 중력을 벗어나 무중력의 공간에서 볼 수 있다면, 이 풍자를 아프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나, 혹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테마가 바로 공감(empathy)인데도 말이다!!!
표정의 뜨거움
자 그럼 이제 우리는 공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주인공 대니(플로렌스 퓨)의 표정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대니의 가족은 죽음 직전, 혹은 죽음 이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니의 가족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표정이 없는 가족은 다시 말해 죽은 가족인 것이다. 대니는 남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대니의 남자 친구 트리스티안(젝 레이너) 역시 무표정하긴 마찬가지이다. 삶에 권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족과 관계의 권태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는 애인이 여주인공 대니 앞에 서 있다. 대니는 어떻게든 표정을 지어야 했다. 대니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 슬픈 표정은, 지금까지 할리우드의 영화에서 보아 왔던, 관습으로서 영화에 나타나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기괴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형이나 언니에게 억울하게 맛있는 것을 빼앗겼을 때나 지었던, 아주 유치하면서도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이다. 대니는 그러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슬픔이 매우 원초적이고 본질적이며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니마저도, 표정을 짓지 않고 무표정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곧 관계의 파탄이나 나아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니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싶었다. 대니는 살기 위해 표정을 지어야 했다. 표정으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대니는 숨을 길게 내쉬며 오열하듯 슬퍼한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 삶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보기로 한 한 무리의 관객이 이 무중력의 영화에서 그나마 붙잡고 나아갈 지표가 있다면, 그것은 대니의 표정뿐이다. 대니는 그의 표정 하나로 우리 관객들을 저 ‘그림’의 차가운 비유의 세계에서 꺼내 뜨거운 공감의 세계로 이끌어 낸다. 대니의 남자 친구가, 남자 친구로서 의미를 지닐 유일한 방법은 대니와 같은 표정을 지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니의 남자 친구 크리스티앙은 단 한 번도 대니와 같은 표정으로 울어주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미국인답게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하는 연애에 대해 쿨하게 관계를 끝맺으면 되는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애인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과장하자면 때론 죽을 수도 있다. 관계는 그만큼 무겁고 무섭다.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고, 관계를 그만큼 무겁게 느끼는 사람은 더욱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이 영화는 불편하거나 무서운 영화다. 자 이제 선택이 남았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볼 것인가. 만약 보았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축제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미드소마>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사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음향과 음악이 압권이다. 대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영화를 많은 부분 음악과 음향이 끌고 간다. 소름과 전율. 당신이 반드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저는 영화사 관계자 아닙니다. ^^;)
**유호정은 얼리어답터 (http://www.earlyadpoter.co.kr)에도 영화평을 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