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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모두가 봐야 할 극단적 예술영화 <엑시트>

<엑시트(EXIT, 2019)>

친구들에게 가끔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영화평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평이 어렵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다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대충 “1) 너만 알고 있는 예술 영화를, 2) 너만 알고 있는 어휘로, 3) 너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을 나열해 대고 있는 잘난 척” 정도로 받아들였다. 큰일이다. 끝없이 겸손해도 친구로 만나줄까 말까 하는 험한 세상에 잘난 척이라니. 


이중 가장 시급한 문제로 “1) 너만 알고 있는 예술 영화”에 대해서 아주 잠깐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왜 예술영화를 나만 알고 있을까? 잘난 척 돋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예술영화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술 영화를 한 천만 명쯤 보고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 나누는 사회라면? 그렇다면 그런 사회에선 나도 “같잖은 녀석이 자기만 알고 있는 예술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며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에 이러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참으로 시의적절한 예술 영화가 한 편 개봉했다. 조정석과 윤아가 주연한 <엑시트(EXIT, 2019)>이다. 이 영화 예술영화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주 명백한 예술영화다. 이제 이 영화 이후로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술 영화를 더욱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지 않나. 예술은 다 쓸데없고 어려운 것일 뿐이라는, 바쁘디 바빴던 저 지난날 산업화 시대의 인식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지 사실 예술이라는 거, 별로 어렵지도 않고, 대단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 알고 있지 않나. 밥 먹고, 자고, 옷 입는 일들이 어느 정도 충족된 배부른 사람들이 혹은 그러한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배고픈 사람이(그런 사람 멋있다), 인생의 의미와 나아가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여러 매체와 도구를 통해, 혹은 매체와 도구 사용의 단련을 통해 예술가 자신의 주제와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감상자는 수용하는 행위를 꾸준히 해 왔고, 우리는 그러한 일련의 상호 작용을 예술이라고 불러온 것이 아닌가? 


물론 초밥 장인이 초에 절인 밥을 손으로 떠서 나오는 한 줌의 양이 매번 소수점 두 자릿수까지 같은 무게인 것도, 자로 잰 듯 일정한 두께로 회를 썰어내는 요리사도 나름의 ‘예술’을 하고 예술적 경지에 오른 것은 맞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등의 먹고사니즘과 관련 없는 행위들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그동안 예술과 예술영화에 거부감을 느껴왔던 것은 먹고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빗살무늬 토기 이후 수 천 년 간 정치와 경제의 기득권자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 우리의 빗살무늬 본능을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렵고 하등 불필요한 것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노동력을 최대한 남김없이 뽑아 먹기 위해 정치 경제 기득권자들이 교묘히 심어 놓은 이식된 DNA이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이 가진 부가가치를 극대화해서 국가를 우선 양적 성장시키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문화유산에 불과하다. 


절대 확인할 수 없는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 즉 인간 본능 중 하나인 예술을 기피하고 어떤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특히 예술 영화에 있어서는 그 세계에 발조차 들여놓으려 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산업화의 위대한 과업을 물려받은 전승자이며, 홉스적 세계 속에서 가족을 힘써 부양해야 하고, 조직과 국가에서 맡은 바 중차대한 일을 해야 하는 능력을 지닌 남성’이라고 여기는 남성 혹은 명예 남성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남(여) 성들은 끝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성역할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버리지 못하고, 결국 그 안에 갇혀서 ‘과도한 노동 스트레스를 풀고 다음 날 다시 일터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줄 도구로서의 영화’가 자꾸 그 도구적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의 영역에서 머무는 것을 싫어하고 꺼린다. 예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 예술이 두려운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교과서의 여백에 자꾸만 만화를 그리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해대는 필자에게 아주 독특한 벌을 내렸다. 쉬는 시간에 다른 학생들에게 이러한 나의 여백 지향적(?) 교과서 사용에 대해 공개비판을 하도록 시킨 것이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나를 둘러싸더니 공부 시간엔 공부나 할 일이지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하냐며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댔었다. 그랬다. 우리는 여백을 봐서는 안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한국화의 아름다움이 여백에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에게서 여백 즉 예술을 빼앗아 가버린 ‘양반 사회와 그들의 권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본가, 정치가들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달하느라 바빴던 교사’들이 떠오른다. 


이대로는 안 된다. 혁명을 못할망정, 예술도 못해야 하나. 왜 수능 시험에서 자꾸 시와 소설 등 문학 작품을 문제로 출제하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 예술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이다. 시와 소설에게 규격과 프레임을 입힌 후 그 안에서 생각하게 한다. 자본가, 권력자, 국가, 종교, 학교, 하여튼 이 모든 자본주의의 시스템들이 우리에게서 예술을 빼앗아 가기 위해 교묘히 협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예술을 빼앗겼다. 심지어 예술 영화는... 그 골치 아프고 머리 아프고 복잡하기만 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나아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예술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스템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세뇌된 우리는 하나가 되려고만 한다. 나중에 어떤 독재자 혹은 독재적 기술, 혹은 독재적 로봇에게 우리를 듬뿍 떠다 먹여 주려고 그러나 보다. 우리는 병충해에 약한 단일종으로 거듭나고 있다. 필자가 예술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우리의 예술이 우리를 결국 구원할 것이라고, 우리가 스스로 예술을 찾아내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위한 예술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결론 내자면 우리는 반드시 예술영화를 봐야 한다. 예술이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우리에게 예술을 다오, 그럼 새 시대를 열어 보이겠다.” 나에게 잘난 척한다고 뭐라고 하지 마라. 2020년도 이제 반년도 채 안 남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엑시트(EXIT, 2019)>는 우리 모두 보아야 할 아주 극단적인 예술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실험이자 두 시간에 걸친 설치 미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이다. 


<엑시트(EXIT, 2019)>에는 먼저 인물이 배제되어 있다. 이 영화는 이른바 설정된 관계만 존재할 뿐, 그 관계를 벗어나 우리를 멀고 먼 이야기의 심연 속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소실점이 없다. 영화에 입체감이 없다. 이 평면 감은 물론 감독에 의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다. 인물을 배제한 채 영화를 이끌어 가겠다는 감독의 의도는 조정석, 윤아라는 당대의 스타 배우들에게 비닐로 된(그것도 쓰레기봉투!) 

<아무리 봐도 봉준호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을 견강부회하여 로베르 브레송적인 장면으로 읽기로 한다. 내게 돌을 던지면 된다.>


옷을 칭칭 감아 입히고, 거기에 방독면까지 덮어쓰게 한 ‘캐릭터를 없애는 캐릭터 연출’을 통해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감독은 이 영화가 스타성에 의존한 채 러닝타임 내내 스타의 발연기만 봐야 하는 그저 그런 상업 영화가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른바 ‘무화(無化)된 스타’란, 예술 영화감독들이 왕왕 사용해 왔던 반상업적인, 말하자면 하나의 전위적 연출 중 하나이다. 


로베르 브레송(나오미 왓츠는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미카엘 하네케의 연기 지도에 대해 긍정인 듯 긍정 같은 긍정 아닌 지독한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미카엘 하네케는 분명 최고의 감독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촬영장에서 너무나 가혹한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배우가 연기할 틈을 주지 않고, 오직 그가 연출한 대로만, 그가 계산한 대로만 움직여야 했다며 배우로서 우회적인 비판의 뜻을 내비쳤었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미카엘 하네케가 처음은 아니다.

<퍼니게임(Funny Games U.S., 2007)>의 나오미 왓츠. 미카엘 하네케는 관객과 배우 모두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미카엘 하네케는 아예 드러내 놓고 자신의 선배를 지목했다. 바로 로베르 브레송이다. 로베르 브레송은 미카엘 하네케의 선배이자 말하자면 모든 영화 예술가의 아버지로서, 한 발 더 나간다. 로베르 브레송은 배우를 배우라 부르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화면 안에서 구현해 줄 ‘모델’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우의 표정은 물론이고, 대사의 톤, 호흡, 휴지(休止), 몸짓, 오브제와의 거리, 발자국 수,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이래 가지고선 도무지 배우가 연기를 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한 신을 위해 화면 안에서의 동선과 발자국 수를 제한해가며 몇 날 며칠을 반복해서 찍었다. 

<홍상수, 정성일,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적 아버지, 로베르 브레송은 예술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며 미국식 상업영화에 반하는 유럽의 예술영화를 만들어 냈다. 사진은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 1966)>>

로베르 브레송은 배우들에게 표정을 빼앗아 갔다. 표정으로 표현되는 자의적 해석의 세계를 거부했다. 움직임-소리-빛 등만이 그의 화면에서 존재하는 예술이었다. 이런 완벽한 통제 아래에서만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예술이 구현된다고 믿었다. 나오미 왓츠는 미카엘 하네케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만약 한 세대 전에 로베르 브레송 감독과 만났었더라면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이 예술 지향. 그의 지루하고 맑은 영화가 새삼 너무 사랑스럽다.) 이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게 표정을 없애고, 왕가위 감독이 외모의 전성기를 달리던 임청하에게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게 하여 그의 얼굴을 가려 버린 것 등이다.(중경삼림에 나타난 임청하의 선글라스와 특유의 무표정은 다름 아닌 로베르 브레송의 왕가위적 구현이었을 것이다.) 스타에게 그의 스타성을 제거하는 방식은, 스타를 보러 온 관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연출인 것이다. 비닐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방독면 속으로 봐야 하는 스타의 얼굴에서 관객은 예술에 대한 감독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는 공간이 배제되어 있다. 공원- 집과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정체불명의 잿빛 연기로 가득 찬 도시로 영화적 공간이 이동되는데, 이후 이 공간은 영화 내내 마치 큰 눈이 와서 교회 첨탑까지 눈이 쌓인 듯한 지극히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평면적 공간으로 뒤바뀌고 만다. 간간히 드러나는 네온사인 간판과, 보습 학원에 갇힌 학생들, 우뚝 솟은 타워 크레인만이 이 연기 속에 그 무시무시한 사우스 코리아가 숨어 있다고 말해 줄 뿐 이 영화에선 공간마저도 자신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도가적 반어를 차용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자는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죽는다. 이후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러다가 우연히 준전문가 수준의 암벽등반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굳이 암벽등반과 같은 위험한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을 굳이 암벽등반으로 해 낸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자가 그에게 얽힌 싸우스 코리아식 갑질 갈등으로 인해 복수심에 불타 거대한 연기를 만들었으나 그 연기는 어차피 비가 다 씻어주고, 우연히 암벽등반을 할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안개로 뒤덮인 싸우스 코리아를 달리다가, 결국 살아남는다, 가 이 영화의 이야기 전부다.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는 소실점이 없다. 영화는 유래 없이 평면적(?)인 캐릭터들을 보여 준다. >

즉, 인물 배제, 공간 배제, 이야기 배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형식의 정형성에 파격을 가하며 우리가 그저 안온하게 콜라와 팝콘을 먹으며 편히 보는 ‘영화’라고 불러왔던 예술 장르의 본질과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예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술이란 우리 스스로는 한 번도 의도한 적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흘려보내는 저 망할 세상과 시스템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 질문이 유효했는가, 혹은 무의미했는가는 그 예술을 수용하는 관객이 판단해 줄 것이다. (예술영화가 나타나질 않으니 이미 나와 있는 상업 영화를 예술 영화로 포장하자.) 우리의 <엑시트>는 예술영화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영화관의 벗이여! 우리 자신으로서 ‘관객’이 판단해 줄 것이다. 아마 천만 명쯤 보게 되지 않을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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