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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시 읽기

주하림의 “여름의 화음”, “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에 대하여

새로운 비극이 생겨났으므로, 당연히 시인은 새로운 비극을 노래해야 한다. 새로운 비극에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비극을 낡은 형식과 언어로 담는다면 그것만큼 낡은 비극이 있을까. 


새로운 비극이란 전에 없던 비극이다. 전에 없던 이유로 도처에 발생하는 비극을 우리는 새롭게 맛보았다. 물탱크의 비유는 그런 점에서 신선하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물의 대전제가 시체 썩은 물이었다니. 우리는 물탱크에 반응하고 물탱크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볼 뿐, 우리 자신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L은 불분명한 이름이다.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 단순히 성이 이 씨여서 L이라고 표기한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그런 촌스러운 명명을 하겠나. L은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나는 L을 문학, 즉 literature라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드는 생각이니 큰 의미 없다. L은 옥상 물탱크를 청소한다. 새로운 시대 새롭게 태어난 비극에 대한 전통적 접근이다. 문학이라면 그런 일도 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L은 시체 썩은 물속에 들어가 물통 밖의 로벨리아를 노래한다. 




여름의 화음


화음 때문에 어름이 길어진다

바다에 폭우가 내리던 날 

L은 혼자 젖지 않는 땅을 밟는다

폐기물통에 버려진 탯줄들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옥상 물탱크 청소가 L의 일이다

물탱크 주면에 피어 있는 로벨리아

로벨리아를 발견한 L은 빈 물탱크에 들어가 노래를 부른다


살이 떨려오는 화음

나는 낯선 남자의 이메일을 받고

그를 만나러 간다

그는 고교생 때 나를 길러주고 길에서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를 기억할 수 없다고

답신했다

나는 포기하게 될 것이다

L은 로벨리아가 인디언 담배라고도 불린다는 것을 일러준다

나는 로벨리아가 카르텔이라고 불려도 상관없다

그날 밤 악명 높은 카르텔에게 붙잡혀 산 채로 머리가 잘리는 꿈을 꾼다

그리고 머리는 그의 물탱크에 버려진다

그의 물탱크에는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살고 있다

검은 물속에 뿌리를 내린 로벨리아, 깨진 유리병, 썩지 않고 부유하는 탯줄, 죽음에 관한 약속, 여러 명의 여자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 머리통은 그것을 병적으로 들여다본다


너는 더러워 나는 남자에게서 온 답신을 지운다

로벨리아 뿌리가 머리통을 감쌌다 그것을 그와 만나는 곳에 데려갈 수 없다





너는 더럽다. 나는 남자에게서 온 답신을 지울 것이다. 로벨리아 뿌리는 카르텔에 의해 잘린 내 머리통을 감싸지만, 그것을 그와 만나는 곳에 데려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는 문학에 대한 혐오. 혹은 문단에 대한 혐오. 남성 문학에 대한 혐오 정도로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시의 ‘들여다본다’와 ‘병적으로 들여다본다’에 주목한다. 시인은 병적으로 들여다본다. 병든 것은 시인의 목을 잘라 물통 속에 버리는 카르텔인데 혹은 문학인데 오히려 죽은 머리통이 바깥을 바라본다. 그것은 새로운 비극에 대한 시인의 자기 다짐이다. 죽은 머리가 병적으로 바라보다니. 죽은 머리는 그의 시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죽은 머리가 아니다. 병적으로 살아있는 머리. 새로운 문학은 L이라고 하는 익명성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서성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머리통은 검은 물통에 갇혀 있다. 이 생생하게 덥고 억울한 갇혀 있음. 주하림은 이를 ‘여름의 화음’이라고 명명한다. 불협을 화음이라고 부르려 한다. 주하림의 문학은 주하림이 죽어 내뱉는 냉소이다. 죽어 내뱉는 냉소를 알아듣지 못하는 L을 더 이상 문학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를 L이라 부르는 것도 황송하다. ‘너는 더럽다니’ 이 시의 내면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문학하는 어떤 남자’들의 이미지, 로서의 존재가 내뱉은 말답다. 너는, 너는 더러워,라고 말하면 안 된다. 너는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주하림은 비극에 갇혀 있지만은 않는다. 그는 또 털고 일어나 무르가(murga)를 춘다. 얼마나 벌어야 너랑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너’는 주하림의 시에서 다른 이름을 얻는다. 서핑과 테니스,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그는 비극이 제거된 어떤 상태를 꿈꾼다. ‘정액 냄새’와 ‘오줌 냄새’만 없다면 그 천국은 제법 천국 다울 것인데. 그러나 그건 쉽지 않다. 



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



얼마나 벌어야 살 수 있을까

파도 위의 써퍼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물결

네가 내 마음에 들려고 노력을 많이 했나봐

입에서 짓무른 복숭아 냄새가 나거든

바스켓백 가득

빵과 물 노랗거나 붉은 파프리카

젊은 날의 조코비치처럼

태양 아래 조코비치처럼

목덜미 땀 냄새

라켓볼

붉은 꽃의 꽃말은

바람이 불고 썩은 정액 냄새가 난다

플라워 패턴

반다나를 쓴 저 애들은 들었어 어디 출신이야 우린 발리에서 만났고

오빠는 그때부터 성격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엔 무엇이 되기 위해 바다를 찾은 것은 아니야

우리가 바다를 찾는 건 바다 앞에서 이런 컨테이너 박스와 노점상을 지어 놓고

여름을 나는 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무르가 몽유병자들의 무르가 때문이야

손에서는 늘 소금 마늘 레몬 냄새가 나고

이런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어

무한히 아름다운 날들 물냉이향 써퍼들이 먹고 난 그릇들을 설거지하다 생긴 상처는 곪고 마르지 않고

해가 지면 너는 모깃불과 치킨 춤으로 범벅된 비치 파티에 갔고

때론 롱보드 대신 다른 것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지

웃고 마시며 흔들며

몇은 유령 취급을 받았지만 대부분 사랑을 나누기 바빴다

해변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을 눈으로 좇게 되어 있어

다시 검은 숲으로 사라져 가는 반딧불이같이 우리의 이별을 생각했지

해변의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오는 공기




그의 시를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상처를 바탕으로, 불화의 시를 써내고 있다. 그것을 새로운 화음이라 부르면 되겠다. 나는 그의 화음 앞에 병들고 썩은 입을 다문다. 때론 나는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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