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별의 재구성> 안현미 시집 읽기

아저씨를 추방하기로 한다.

‘아저씨’란 시의 세계에서 쫓겨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아저씨에겐 과거가 있다. 

그 과거를 차마 다시 입에 담기 싫다. 

아저씨는 아저씨가 아니었을 때에 

그가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 

시의 세계에 한 번 기웃거려 본 적이 있다. 

시의 세계란, 사람과 사람이 혹은 사람과 사물이

관계를 맺고,

언어를 교환하고,  

각자 꾸는 꿈을 보여 주는 세계이다. 

아저씨들은 그 세계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시의 세계를 벗어나, 곧 함부로 걷기 시작했다.



어항골목


고장 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

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

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서 골목이 부레처럼 부풀어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

벙, 여자는 의족을 벗고 부풀어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

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

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퐁

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

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퐁퐁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아저씨는 안현미 시인에게 ‘사내’라고 호칭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사내는 안현미의 “어항골목”이라는 시에서 등장하는 ‘사내’ 일 수도 있다. 어항골목은 어항을 통해 바라보는 골목이다. 그 골목은 이 도시에서 가장 후미진 모퉁이이고, 투명한 곳이다. 나는 연탄재와 쓰레기봉투가 나와 있던 황량한 골목이 떠오른다. 나무들의 가지가 잘려 있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거리에 깔린 보도 블록을 하나하나 다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던 동네. 주름이 가득한 노인 한 사람이 낡은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 한 명 한 명을 모두 관찰하며 하루를 보내던 골목. 감나무에서 이른 감이 떨어져 늦여름 내내 썩어가던 그 동네. 그 골목의 어느 방에서, 화자는 어항을 통해 골목을 바라본다. 아저씨는 물론 화자의 현재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아저씨는 화자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아저씨는 늘 지나치면서도 알지 못하는 골목이 있다. 어항골목이다. 그곳에서 아저씨는 사내라 불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여자는 의족을 하고 있다. ‘내 다리는 잘려버렸다.’ 여자는 의족을 하고 사막을 건너왔다. 사막은 비유된 공간이라 생각하지만, 의족은 비유된 것인지 실제 의족인지 판단하기가 망설여진다. 의족도 비유된 것이다. 사막, 의족 여자가 하는 말을 더 들어 보아야 한다. 어항을 통해 바라보는 골목으로 사내 하나가 고장 난 가로등처럼 등장한다. 고장 난 가로등은 늘 조금씩 늦거나 빠르다. 켜져 있길 바랄 땐, 꺼져 있다. 꺼져 있어도 좋을 때엔 늘 혼자 켜져 있다. 고장 난 가로등은 고장 나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발견’되기도 한다. 그 고장이 나 있는 상태가 여자에게 발견된다. 발견, 남자는 발견되어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 남자들은 말한다. “그녀는 내가 고장 난 가로등처럼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악연이다. 고장 나 있지 않았더라면, 발견되지도 않았을 한 남자를, 여자는 지나치지 못하고 사랑하게 된다. 여자는 사랑을 하며 사막을 지난다. 다리가 잘린다. 여자의 회상, 혹은 상상 속에서 여자는 어항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를 사랑하기 이전으로 헤엄쳐간다. 꼬리지느러미로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던 자신을 발견한다. 고장 난 사내를 ‘발견’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사랑 이후에도 여전히 고장 난 상태로 존재하던 존재. 여자의 어항 속으로 뒤늦게 남자가 산소통을 어깨에 달고 들어오려 한다. 사내의 사랑은 늘 이런 식이다. 후미진 동네의 어항 골목에 물고기 달이 뜬다. 여자의 사랑엔 사내는 없다. 하지만 이 시에선 사내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내는 산소통을 달고 존재할 뿐이다. 사내 이전에 여자는 사막과 의족을 벗어버리고 어항 속에서, 이토록 작은 물로도 이처럼 아름다운 수영을 즐길 수 있었던, 존재로 돌아간다. 

아저씨는 과연 이 시를 읽게 될 수 있을까. 

안현미의 <이별의 재구성>은 아저씨들을 위한 시집이 아니다. 아저씨들이 읽었으면 좋겠지만, 

아저씨들은 바쁘다. 자신이 추방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전히 바쁘다.    



삶은 나



나는 나의 발명가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

나는 나의 꽃밭 쓸데없이 아름다운 생각들을 심어 놓은 꽃밭

나는 나의 채집가 휘발하는 시간의 뒷모습을 채집해놓은 액자

나는 나의 조각가 고독 속에서 영혼을 꺼내는 우울한 조각가

나는 나의 방랑자 지도에도 없는 나를 방랑하는 가난한 방랑자

나는 나의 자궁 스스로 엄마가 되어 나를 낳는 자궁

나는 나의 식자공 자음과 모음을 두드려 만든 시

나는 나의 테러리스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생각에 찬 테러리스트

 테라스를 지나 세상의 고독한 사람들이 꿈속으로, 애인

속으로, 싸이버 게임 속으로, 혹은 불면 속으로 들어가 있

을 시간, 나는 소녀와 엄마와 창녀를 한몸에 한영혼에 가

진 치명적인 여자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먼진 여자이니 테라스를 지나

나는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생각에 찬 나의 테러리스트

나는 자음과 모음을 두드려 만든 시를 만드는 나의 식자공

나는 스스로 엄마가 되어 나를 낳는 나의 자궁

나는 지도에도 없는 나를 방랑하는 무심한 나의 방랑자

나는 고독 속에서 영혼을 꺼내는 우울한 나의 조각가

나는 휘발하는 시간의 뒷모습을 채집해놓은 나의 채집가

나는 쓸데없이 아름다운 생각들을 심어놓은 나의 꽃밭

나는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나의 발명가

나는 나의 그림자의 나

푹푹 삶아먹는

삶은 나





이 시에서 아저씨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추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시의 절망과 한에 몸서리친다. 이 절망과 이 도저한 세계는 한 번의 사랑이나 한 번의 이별로 만들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에서 나로, 나에서 나의 분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것이며, 그 역사 속에서 화자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여성 자신을 반성하며 테러리스트가 될 생각을 한다. 이 인식 앞에서 아저씨는 어설프게 사랑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선 아저씨가 시의 세계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가 아직 소년이고 싶다면, 그는 우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나는 지금 안현미의 <이별의 재구성>을 읽고 있을 뿐이다. 아저씨의 발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아저씨는 눈을 감는다.


작가의 이전글 월요일의 시 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