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ke Kim Jul 18. 2016

DIN

공공기관용 서체의 모범답안

아마 한국에 살고 있는 독자들 중 글꼴에 민감한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왜? 도로표지판에 들어간 글자들은 예쁘지 않을까?” 

“왜? 공공기관의 인포메이션들은 모두 제각각일까?” 


이런 질문의 답은 한국의 디자인 역사를 되짚어 봐야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오랜시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공인된 공공기관 전용서체가 없었음이 그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정부에서 매번 표지판을 새로 디자인하고, 차량용 번호판도 새로 디자인하며, 공공기관의 문서서식을 디자인해도 통일되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전용서체 개발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표지판의 한글을 보면 크기, 자간, 장평 어느하나 통일된 곳이 없다.


보통 자동차는 6년 후를 내다보고 디자인한다는 말이 있다. 자동차가 시장에서 교체되는 주기가 평균적으로 6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꼴은 어떨까? 모든 글꼴 디자이너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유명한 글꼴의 선호 주기는 10년이 넘는다. 평균적으로 따지면 20년이 넘을 것이다. 헬베티카나 가라몬드 같은 글꼴은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렇기에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하는 공공기관용 서체는 굉장히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집 밖으로 나와 도시를 헤맬 때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될 서체가 바로 국가에서 공공시설에 사용하는 서체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할 글자인 ‘DIN’은 한 국가를 대표하는 공공기관용 서체로써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DIN이 적용된 독일의 도로표지판


DIN은 글꼴 이름에 글꼴의 성격이 모두 설명되어 있다. ‘DIN’은‘DeutscheIndustrie-Norm(=German Industrial Standard)’의 약자로 ‘독일 공업 규격’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DIN이란 단어는 독일 내에서 계량화가 가능한 모든 사물에 공통으로 붙을 수 있으며, 독일의 공식 서체도 DIN Schriften이라 불린다. DIN은 처음부터 일반 대중용으로 설계된 글꼴이 아니다. 처음 DIN 폰트는 1905년 프러시안 철도회사(Preußische Staatseisenbahnen)에서 화물트럭들의 표시를 통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 후 1920년, 독일의 모든 철도회사들이 합병함에 따라 프러시안 철도회사의 글자체가 모든 철도회사 기준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DIN’의 가독성이 다른 서체에 비해 월등히 좋고 기계나 표지판에 적용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크프루트에 위치한 서체 회사인 David Stempel founded는 기존에 있던 서체 도면을 발전시켜 최초의 표준화된 DIN을 완성한다. 독일 산업 표준협회는 1936년에 다시 한번 다듬어 ‘DIN 1451’을 도로 시안 및 공공의 영역에 활용하기로 하였는데, 이 서체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타입 페이스 DIN의 시작이다.


독일 열차들에 다양하게 적용된 DIN 폰트


사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DIN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의 세계대전과 맞물린 점이 많다. 우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화물트럭과 철도는 군수물자를 운반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보더라도 독일의 군용 물품 통합작업이 굉장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전쟁은 비극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종종 인류의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타임라인이 되기도 한다. 지금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DIN의 시작은 그렇듯 전쟁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유산 중 하나다. 


DIN은 전쟁의 역사를 담은 서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글꼴의 역사를 보더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 서체는 자연도태되기 마련이다. DIN이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단순히 국가에서 지정한 서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 공공의 영역에 지배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판독성과 가독성, 심미성이 모두 충족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분들이 가독성은 자주 들어 익숙하겠지만 판독성은 생소할 것이다. 판독성(legibility)은 ‘글자의 모양을 보고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가?’를 말한다. 좀 더 의미를 넓힌다면 그 글자들이 조합이 어떤 뜻인가를 알아보는 데까지 판독 범위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도로에서 표지판의 내용을 멀리서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다거나, 위험한 장소에서 안내문에 적힌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일은 언어가 추구하는 1차적인 목적에 해당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디자이너는 장소와 용도에 따라 분명한 형태의 글자와 크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판독성은 가독성과 마찬가지로 글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DIN' is the magic word for everything that can be measured in Germany


예를 들어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 표지판, 버스노선 등 공공 안내판의 서체는 날씨 및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잘 읽혀야 한다. 또한 운전자들의 시야에 편하도록 배열이 필요하다. DIN은 단순화한 문서의 획뿐만 아니라 대문자 아이(I)와 소문자엘(l)처럼 유사한 모양을 띈 글자에 고유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시속 130km가 넘어도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획의 구부러짐, 꺾임을 세밀하게 조정해 밤에 쉽게 경험하는 빛 번짐 효과에도 대비한 철저히 기능적인 서체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다른 서체에 비해 날씬하고 기하학적인 느낌이지만, 과하지 않은 적당한 곡선과 글자 간격에 세밀한 차이를 두어 'GILL SAN'이나 'FUTURA'와는 또 다른 기하학적인 느낌을 갖는다.


DIN을 활용해 잘 정돈된 독일의 표지판
DIN을 사용한 항권권 디자인


이렇게 조형성, 가독성, 판독성을 모두 만족시키고 교통 표지판, 거리 표지판, 집 번호와 자동차 번호판과 공산품에까지 적용되어 되어 오랜 기간 검증받은 서체는 아마도 DIN이 유일할 것이다. 이러한 우수성은 독일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의 도로 표지판에도 활용돼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DIN의 인기는 1980년대 후반, DIN1451을 기반으로 한 서체가 더 다양하게 나오기 시작하며 지속되게 되었다. 또한 1995년 폰트 디자이너 알베르트 장 풀(Albert-Jan Pool:1960~)은 DIN 1451를 더 세련된 형태로 확장하여 FF DIN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서체는 발표되자마자. 잡지, 광고, 출판 및 웹 디자인과 게임, 기업 로고에 사용되며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 전반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알베르트 장 풀의 'FF DIN'


DIN은 굉장히 특이한 서체다. 사실 처음 이 서체가 발표될 당시 독일에는 바우하우스가 있었고 모든 디자인 교육의 기초가 되었던 이 학교의 선임교수였던 허버트 바이어(Herbert Bayer: 1900~1985)와 주스트 슈미트(Joost Schmidt: 1893~1948)는 철저히 DIN을 외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현재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유명한 서체이며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서체이기 때문이다. 미국 출신의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겸 비평가였던 비어트리스 워드(Beatrice Warde, 1900~1969)는 올바른 타이포그래피를 이야기하며 “눈 앞에 좋은 와인 한 병과 두 개의 잔이 있다. 하나는 호사스럽게 장식된 황금 잔이고, 또 하나는 수수하고 투명한 유리잔이다. 아무거나 골라 와인을 따라 보라. 어떤 잔을 고르느냐에 따라 와인에 대한 조예가 판가름 날것이다. 와인을 모르는 자, 즉 와인의 색과 향과 맛에 관심이 없는 자라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황금 잔을 선택할 것이다. 반대로, 와인에 특별 한 애정이 있는 자라면 내용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투명한 유리잔을 선택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은유와 마찬가지로 DIN이 가진 특징은 그 투명한 유리잔과 같이 어디에 사용하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디자인이 압도하지 않는 겸손한 미덕을 지녔다.


DIN의 반대파였던 바우하우스의 허버트 바이어와 주스트 슈미트


독일의 대표적 디자이너 디터람스는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라고 말했다. 핵심에만 집중하고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고 단순한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Less but Better'다. DIN은 디터람스가 말한 좋은 디자인에 부합한다. 처음에 보았을 때에는 개성이 뚜렷하다거나 한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두드러진 매력은 없지만 다른 서체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정한 글자 너비와 두께, 정교하고 세밀하게 특징을 살린 작은 세리프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단정하게 정리된 시각적인 편안함을 준다. 또한 가독성과 판독성은 다른 서체에 비해 월등히 높으며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심미성까지 갖추고 있다. 하나의 서체가 실용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는데다가 정교하며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의 한 수’라 할 만큼 굉장한 장점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디터람스가 디자인한 라디오


그러한 장점은 일반 소비자와 더불어 디자이너들에게도 굉장히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DIN 폰트는 독일, 유럽 교통 표지판에 널리 쓰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그 예로 뉴욕의 도로 표지판과 MoMa(the Museumof Modern Art in New York)의 전시용 디지털 폰트, 다양한 영화 포스터와 드라마의 로고, JetBlue 항공사의 로고, Channel 4Branding 화면, 아디다스의 광고와 버밍엄 대학교의 로고 및 문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더 다양한 사인물과 웹디자인, 인쇄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버밍엄 대학교의 로고
제트블루 항공사의 로고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타이틀로고
미드 '덱스터'의 오프닝 타이틀용 로고


국가에서 공인되어 사용되는 서체는 단기간의 성과나 보여주기용 결과가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사랑받고 오랜 기간 다듬어져 완성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한다. 하나의 서체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시대를 가로질러 오랜시간 사랑받는 서체는 절대 한 그루의 나무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모든 문화의 기반은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내용에 있겠지만 그 내용의 보임이 어설프면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다. 특히 무의식 중에도 매일 봐야하는 도로의 정보와 공공기관의 디자인은 우리 삶에 있어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준다. 한 국가에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워 정책을 만들 때는 당장 보이는 것보다 향후 50년을 내다봐야 한다. 언젠가 DIN과 같이 멋진 서체가 한국의 도로표지판과 공공디자인에도 적용되기 바란다. 






위 내용은 '아레나 옴므' 매거진. 2015년 7월에 연재된 '글자를 위한 글'입니다.


글 : 오영식(토탈임팩트), 김광혁(VMKZ)


https://www.facebook.com/nitro2r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