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이병헌 주연
오랫동안 종이밥을 먹는 편집 디자인을 했던 저에게 이 영화는 꽤나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편집 디자인의 대부분은 인쇄로 넘어가는 홍보물이나 책자를 만드는 일이기에 그간 다양한 종이를 선별하고 사용해 왔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종이들이 얼마나 위대한 사물인지 절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는 나무와 종이라는 두 가지 사물이 메인 소재로 등장하여 극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만수의 삶이 마치 종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이는 나무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죽지 않으면 종이를 만들 수 없으니 말이죠. 게다가 나무는 자연 그 상태에서는 생태계에 보탬이 되는 일부의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종이로 변하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뀝니다. 종이는 다양한 정보를 담는 매개체로서 끝없이 정보가 기록되고 쌓인 후 그 소임을 다하면 버려지거나 다시 재활용됩니다.
만수의 삶도 이와 다를 바가 없어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였다가 직업을 갖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쓰임이 결정됩니다. 빈 종이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새겨 넣은 후에야 가치를 인정받듯 만수는 자신의 이력에 학력과 다양한 자격증을 넣은 후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아 회사의 간부가 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른 후, 거기 쓰인 정보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자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해고되어 버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재활용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다시 인정받아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죠. 이렇듯 나무-종이-재생지의 과정을 겪는 종이의 일생처럼 만수의 일생도 이제 인생 3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종이는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듯 보이지만, 다시 재활용되어 또 다른 쓰임을 얻습니다. 만수의 삶 또한 그러합니다. 회사가 필요할 때는 간부로서 빛나지만, 시대가 변하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버려졌습니다. 영화는 이것을 한 개인의 불행으로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자리,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의 불안한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이 한 장처럼 가볍게 취급되는 삶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특수지가 뭐야?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특수지는 말 그대로 특수한 용도로 쓰여지는 종이를 뜻합니다. 여러분이 쓰는 지폐나 로또 용지, 우유팩, 담배필터, 명함에 쓰이는 오돌도돌한 질감의 종이, 유명 그림을 감쪽같이 인쇄하는 고급지, 방진복에 사용되는 종이 등이 모두 특수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 특수지라는 종이들의 사용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종이가 특수지라기 보단 저가의 일반용지인 모조지나 아트지, 스노우지이며 정보를 담는 매체가 종이에서 디지털화로 옮겨간 이후엔 점점 그 사용량이 줄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펄프, 부자재, 에너지 가격 상승과 코로나 이후 경기 둔화로 인해 인쇄물량이 감소했고 중국, 동남아 등 저가의 제품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한국의 제지업계들은 영업이익이 많이 감소했습니다.
한국에서 생산된 종이의 매출 중 50%를 넘기는 것이 골판지, 백판지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배달음식 수요가 늘어나고 쿠팡이나 컬리같은 배송제품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품을 포장하는 패키지 시장이 크게 활성화 되었고 홍보나 광고를 예전처럼 전단이나 카탈로그 형식으로 돌리지 않으니 일반지나 특수지 시장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제지회사 간부 후보자 4인은 모두 특수지를 만드는 제지회사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현실이 그대로 반영 된 상황인 것이 특수지를 납품하던 회사들은 불황난에 허덕이고 있고 해외의 유명 제지회사들은 인수합병의 물결속에 집어 삼켜지고 있습니다. 현재 제지 산업은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인수합병을 통해서만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시장의 압박, 환경 규제 강화, 국내 수요 감소가 심화되면서, 기업들은 규제가 완만한 해외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제지공장들의 상황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수합병된 후 공장 시스템이 AI를 접목한 완전 자율화까지 하고 있으니 공장이 살아남는다 해도 노동자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건 현재 일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도 느껴지는게 예전엔 카탈로그나 브로슈어를 만들 때 비싼 특수지를 쓰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카탈로그나 브로슈어를 잘 만들지도 않을 뿐더러 만들더라도 비싸지 않은 종이를 쓰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특수지의 종말시대를 살고 있으니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충분히 납득 됩니다.
원래 원작인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책과 영화에는 나무가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찬욱 버전인 <어쩔 수가 없다>에는 영화의 첫 화면부터 나무가 무성한 마당을 비롯해 가족이 서로 얼싸안은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가족이란 나무처럼 서로 다른 줄기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만수의 아들은 친자식이 아니고 강아지들은 같은 종이 아님에도 서로 끌어안아 하나의 큰 나무를 이루며 가족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만수가 집착하는 분재는 만수가 자신의 삶을 뜻대로 이루고 싶어 하는 은유처럼 보였습니다. 만수의 삶은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왔습니다. 보란 듯한 직장, 멋진 자택, 외제차, 예쁜 아내, 금쪽같은 자식들, 마당을 뛰어노는 두 마리의 개. 말 그대로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준 만큼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분재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강박적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안 되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범모(이성민)를 상징하는 배나무를 보면 만수가 범모의 집에 염탐하러 갔을 때 배나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배나무는 사랑과 희망을 뜻하는데 범모의 삶을 보면 희망이었던 회사에서 잘린 후 사랑하는 아내마저... 어쨌든 범모의 삶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메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희망과 사랑 따위는 없습니다.
만수의 아버지 서사를 보면 한때 군인이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돼지를 키웠는데 그 규모가 꽤 됐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만수가 사는 지역의 재개발지가 한때 만수 아버지의 축사였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 보면 말이죠. 그러나 만수 아버지가 키우던 돼지들은 어느 날 유행병이 돌아 떼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에 비관하여 만수의 아버지도 자살합니다.
영화에서 돼지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시조(차승원)를 처리한 후인데, 영화에서 돼지는 죽음을 뜻합니다. 만수에게 있어 돼지란 죽음과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만수가 아버지가 죽은 후 물려받은 것이라곤 전쟁에 쓰였던 총밖에 없었는데 총 역시 죽음을 뜻합니다.
뱀은 욕망과 타락과 유혹 같은 뜻과 재생과 부활이라는 뜻을 함께 합니다. 뱀이 등장하는 곳은 범모의 집입니다. 배나무가 범모를 상징했다면 뱀은 아라(염혜란)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무능력한 모습에 실망해 누군가를 유혹하고 타락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아라가 기존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인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뱀이 탈피하는 것과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직업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곤 합니다. 특히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했던 일을 천직이라 부르며 자신의 쓰임이 다할 때까지 일하다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직업으로 자신의 의미를 대신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성이 스미스라면 대장장이, 테일러라면 재단사, 채플린이면 목사, 베이커면 제빵사를 의미합니다. 이름이 그 사람을 대변하는데 그 이름에 자신의 직업을 넣는 것은 그 직업 자체가 그 사람의 긍지를 만들고 인격을 대표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듯 직업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압축하는 책 한 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만수에게 있어 그리고 다른 경쟁자들에게 있어 자신의 반평생을 바쳐온 직업이란 모두 각자의 금자탑입니다. 남들이 모른다 해도 본인들이 만들어낸 종이는 지폐, 여권, 담배 필터, 휴지, 명함, 책자 등등 인류의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한 용도로 수천 년 동안 이용되어 왔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직업이 없어진다는 것은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 같은 위기감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함은 이력서가 통과된 자들만 가질 수 있는 보증서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누구나 명함을 가질 수 있지만 원래 명함이란 권력을 나타냈습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만 보더라도 종이질과 폰트의 고급스러움, 인쇄의 퀄리티가 그 사람의 권력적 위치와 가치를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죠.
주변을 보더라도 명함을 자신의 가치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름 모를 회사의 명함이 아니라 삼성이나 국회 같은 곳의 로고가 명함에 찍혀 있으면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죠. 그게 자신의 본래 가치가 아닌 회사의 명예를 빌려온 것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명함이란 것은 자신의 이력서가 통과되고 긴 시간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같은 종이이지만 그 안에 담긴 함축적 정보에 의해 그걸 가진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타로를 가르치고 상담을 하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타로의 이미지나 의미들이 교차되곤 했습니다. 첫 장면 만수를 보면 멋진 집, 안정적인 부, 행복한 가족들, 그리고 개 두 마리가 보이는데 이걸 보고 바로 생각난 것은 펜타클10과 컵10 입니다. 컵10은 가족의 안녕과 행복의 완성을, 펜타클 10은 성주나 지주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부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만수의 해고를 보고 생각난 것은 데스입니다. 데스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해고나 어떤 의미의 종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이후엔 소드4가 생각났습니다. 소드4는 배신, 불명예, 망신, 갈등을 이야기하는데 이미지를 보면 칼 3개를 빼앗기거나 버려진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카드는 그 주체가 누구냐가 중요한데 뺏기기 전에 먼저 뺐어야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만수가 자신의 경쟁자들을 제거해 가는 모습을 보면 소드4와 닮아 있습니다.
결국 만수가 얻은 카드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천사가 나팔을 불어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심판은 카드의 이름과 달리 구원, 소생, 부활을 뜻합니다. 고민이 있다면 결단(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 신념(믿음)을 가지고 결단함을 의미합니다. 만수는 최종 승리자가 되었지만 심판 뒤에 남은 것은 종말밖에 없습니다. 만수가 마지막에 서 있는 공장에 사람이 없는 것은 이렇듯 하나의 세상 또는 직업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재밌는 것은 만수가 원래 다니던 직장의 이름이 '태양제지(Sun)' 그리고 입사를 하기 위해 면접을 본 곳이 '문제지(Moon)'라는 것입니다. 타로에서 태양은 활력, 성취, 긍정, 완성을 뜻하지만 달은 혼란, 갈등, 불안을 뜻합니다. 실제로 만수는 태양제지에 있을 땐 활력이 넘치고 긍정적이며 자신 있었지만 문제지의 면접을 볼 땐 불안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달은 의처, 의부증, 불륜도 나타내곤 하는데 만수가 면접을 본 후 불안이 극에 달하자 나타내는 게 바로 의처증이었습니다.
중반의 자잘한 사건들을 보면 더 많은 카드들과 대치되는 이미지들이 나왔습니다. 범모는 컵4, 아라는 러버와 타워, 동호 아빠는 데빌, 오진호는 컵 나이트에 해당됩니다. 범모는 실의에 빠졌고, 아라는 사랑에 빠졌고, 동호 아빠는 지배에 빠졌고, 진호는 충실히 미리를 도와줍니다.
제가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몸담은 게 올해로 25년째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등장하는 다양한 실직자들의 모습을 보며 공감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실직에 가까운 일을 10년 전에 겪었습니다. 그때는 회사가 망하고 몸까지 망가져서 도저히 일을 다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빚은 또 산더미처럼 많아서 직업을 다시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새롭게 시작한 게 글쓰기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작가가 되고 싶었고 그걸 어떻게 이룰지 몰라 블로그부터 시작했습니다. 블로그에 별일 없는 일상을 적을 수는 없었기에 영화에 대한 리뷰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힘든 시기에도 영화를 하루에 1~2편은 꼬박 봐왔기에 그냥 휘발되는 감상이 아까워 글로 남기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약 2년, 리뷰 100편쯤이 쌓였을 때 저는 디자인에 관한 글, 책을 읽고 얻은 통찰에 관한 글,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를 저격하는 칼럼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걸 보고 있던 잡지사와 다양한 매체에서 연락이 왔고 그게 쌓이고 쌓이다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만수에 비하면 꽤나 행복한 삶이죠.
하지만 아직까지 놓지 못하는 게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은 저의 반평생을 함께한 일이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어디에 가서 저를 소개할 때 가장 앞서 명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들은 저에게 다른 재능도 많으니 디자인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나마 남들보다 잘할 수 있고 남들보다 많이 아는 게 디자인이다 보니 이 일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란 그냥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저에게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자인을 못하게 됐을 때의 좌절감이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맛봤고 직업 하나를 잃는 게 아니라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해고와 실직이 남 일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것이라는 걸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저야 가족이 없지만 가족까지 부양해야 한다면? 그럼 말해 뭐 하겠습니까. 누구보다 절박하죠.
1997년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쓴 원작 책, 그리고 2005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를 보면 인간에게 노동은 삶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 전체이고 본인 자신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 부(富)의 본질은 그 화려함 뒤에 온갖 추악한 것과 부끄러운 것과 비정함과 부도덕함이 깔려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만수 가족이 누리게 된 중산층의 행복이란 범죄와 살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배우자의 부도덕함을 눈감아주는 뒤틀린 포용의 결과입니다. 이걸 가족이 아닌 사회로 대치해서 생각한다면 지금의 눈부신 발전과 경제적 축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인의 희망과 행복을 폭력적으로 쟁취한 결과이며 만수의 살인목록은 타인에 대한 뒤틀린 욕망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라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수를 해고한 것은 거대한 자본주의를 뜻하는 회사이지만 그의 분노와 살인 충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대한 자본주의가 아닌 같은 하층민인 노동자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살인 목록에 있는 실직자들은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피해자이기에 그들을 죽인다고 폭주기관차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선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에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고 싸우라"는 만수에게 "그래봤자 나만 잘린다"라고 말하며 만수를 나무랍니다. 아무리 곤충들 중 포식자라 할 수 있는 사마귀여도 달려오는 수레바퀴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서는 아무리 부당하다 해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영화에서 만수는 시체를 묻은 땅 위에 과실수를 심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만수의 아내 미리는 아들에게 "그 나무 아래엔 돼지가 묻혀 있어서 나무가 그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우리 사회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뿌리내리고 그 양분을 먹고 자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걸 두고 위선자들은 먹고살려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하곤 하죠.
박찬욱 감독은 사실 초기작 2편을 거하게 말아먹고 <공동경비구역 JSA>에 와서야 빛을 보기 시작, <올드보이>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병헌 배우는 초기작 6편을 거하게 말아먹고 <내 마음의 풍금>, <공동경비구역 JSA>로 빛을 보기 시작,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배우로서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감독과 배우가 서로에게 구원자였던 셈입니다.
배우에게 감독은 절대자처럼 자신의 연기를 조율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존재이고 감독에게 배우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장하고 드러내는 존재이자 끊임없이 창의력을 불러일으키는 뮤즈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감독이 좋은 배우를 만났을 때가 되어서야 명작이 탄생하고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이겠죠.
박찬욱 감독은 배우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에선 신하균과 배두나를 발굴했고 <올드보이> 같은 경우 착한남자, 로맨스 담당이었던 최민식을 망치 든 하드보일드 마초남으로 세계에 알렸고 <친절한 금자씨>에선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를 복수에 불타는 친절하고 매혹적인 살인자로 만들었습니다.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도 많이 발굴해서 한국 영화계를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병헌 배우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화려합니다. 코미디, 로맨스, 액션, 공포, 사극, SF, 애니메이션 모든 분야에 걸쳐 명연기를 펼쳐왔고 현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50년이 흐른 후 한국 영화에서 가장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이병헌을 뽑아야 할 정도로 말이죠.
저는 종종 명감독의 영화를 보며 너무 힘을 줘서 만들면 "천재가 너무 천재인 걸 티 내면 재수없고 재미없어"라 말을 해 왔는데 저에게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헤어질 결심>이 그런 영화였습니다. 영화도 재밌고 분명 완성도도 높았는데 저는 박찬욱이 너무 칸이나 해외 영화제를 의식해서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박찬욱의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특유의 마이너한 감성과 불편한 정서, 마니아적 변태력의 발현이라고 보아왔는데 <헤어질 결심>은 너무 점잖은 척을 하는 것 아닌가? 싶었거든요.
이병헌 배우는 다양한 연기를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쪽은 코미디를 가미한 연기를 했을 때입니다. 이병헌 배우는 대표적인 영화들이 모두 진지한 연기를 했을 때이지만 저는 조금 헐렁하고 능청스런 모습을 보여줄 때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광해>, <그것만이 내 세상>,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보여줬던 그의 연기는 코믹하지만 뭔가 슬프고, 인간적이지만 탐욕과 고뇌가 엿보일 때가 있어서 '이건 이병헌 아니면 못하겠다' 할 때가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이병헌의 나이들어감이 좋습니다. 젊어서는 그냥 잘생기고 연기잘하는 배우였는데 이젠 그의 주름살과 피로한 얼굴에서 인생의 고뇌와 다양한 감정이 보여서 좋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이런 감독과 배우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엄청나게 힘을 주고 만든 영화라기보단 무림고수가 검이 아닌 버드나무 가지 하나 손에 쥐고 춤을 추듯 싸우는 느낌의 영화입니다. 진짜 고수는 힘을 다 쏟아붓지 않아도 압도적인 경지를 보여줍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감독과 배우가 서로를 통해 다다른 그 경지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작품을 넘어, “명감독과 명배우가 만나면 무엇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세련된 대답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수가없다>가 좋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감독과 배우 둘 다 필생의 내공을 담아 영화를 만들었지만 관객은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기에 부담 없이 좋았습니다. "인생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 될 수 있다"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개인들은 비극을 겪고 있지만 그걸 보는 우리는 희극으로 웃으며 볼 수 있게 만드는 감독의 작품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50살을 바라보며 직업의 종말, 직장의 종말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저에겐 너무나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최고 명작이라고 하기엔 좀 아쉽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을 영화기에 저는 보는 내내 좋았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께 강추합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배우가 명연기를 펼쳤지만 저는 손예진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손예진 배우는 데뷔부터 2010년까지 밝고 예쁘기만 한 역할만 해오다가 <공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에 이르러 기존과 다른 캐릭터 역활을 소화했는데 이번엔 만수의 아내, 미리 역할을 하며 정말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보여주며 다시 한 번 연기 정말 잘하는 배우였음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이번 영화를 보며 손예진 배우가 공포나 서스펜스 같은 장르에도 나와주길 기대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