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를 기억하고 기다리며 - 스포 △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p.12
책을 읽고 이 부분을 필사했는데,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같은 부분을 읊고 있다. 이 외에도 원작의 대사와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는 부분들이 있다. 강렬한 파란색 책 표지, 고개를 떨구었지만 작은 주먹을 힘있게 쥔 강이의 모습은 배우 방민아가 책에서 튀어나온 듯 그대로 연기한다. 아람과 소영 두 친구, 강이의 엄마아빠 역시 상상했던 그대로다.
반면, 책에서는 상당히 상세히 전후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비해, 영화에서는 갑작스러운 장면 변화나 인물간의 분위기로 알.아.서. 감지해야 할 내용이 적지 않았다. 몇 안되는 관객들이 중간중간 당황하고 놀라는 느낌이 객석을 떠돌았다. 성적인 묘사, 폭력적인 표현을 거의 모두 들어내고 자제력 있게, 함축적으로 연출한 점이 아주 좋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의 경우 상상으로 유추해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 또한 관객의 몫이다.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으로보다, 가수 아이유 강추 소설로 더 알려진 느낌이 있다. 2020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의 수상작으로보다, 걸스데이 방민아의 주연작으로 더 알려진 느낌이 있다. 작년 부산에서 이 작품을 놓치고, 당시 좋았던 작품들이 1년이 지나 겨우 개봉관을 잡기 시작하는데 반가운 관심을 가지며 책을 먼저 빌렸다. 분류로 치자면 청소년 성장소설인 셈이지만, 인간의 악한 마음과 실체 가득한 폭력을 다룬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200쪽이 채 못 되는 짧은 분량, 열여덟 여고생 세 친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좁은 반경의 이야기지만, 미묘한 심리 변화를 사실적으로 그리며 매번 독자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새로웠다. 대개 나쁜 방향이었다. 친구에 기대나 싶었으나, 배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믿음을 저버린다. 엄마와 아빠의 변치않는 기다림이 아이를 구원할까 싶었으나, 1도 소용없었다. 인생의 진면목은 이에 가까울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살고 싶고, 그렇게 믿고 싶고, 또 그래야 하겠지만,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빈곤과 함께일수록, 잔혹한 삶은 특히 더 사실에 가깝다. 가장 큰 일탈을 벌이는 친구, 제일 못된 마음을 가진 친구가 가장 큰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없거나, 가장 가난하거나, 또는 아주 부자이지만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상황에서 가장 잘못된다고 볼 수도 없다. 현실에는 그런 정형화된 패턴이 잘 존재하지 않는다. 청소년 문학으로 추천이다. 영화 역시 추천이다.
# 한 구절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대부분 유치했고, 지혜로운 대답은 대부분 비겁했다. p.87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은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중략) 강이는 나아갔다. 이 폐수는 강물로 이어질 것이고, 강물은 바다로 이어질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죽음이든, 아니든. p.139/153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는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돌아오기만 하면,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동네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나는 끔찍함에 익숙했다. 나는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병신 같은 사람들 곁에 병신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기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