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북강녕 Sep 14. 2021

아무튼, 왕가위 #7

#7. In the mood for BIFF - 화양연화


2020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왕가위 감독은 1997년 『춘광사설春光乍洩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양조위 배우는 2000년 칸 영화제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春光乍洩은 '봄 햇살처럼 스쳐가는 잠깐의 사랑'을 뜻한다. 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행복한 순간'을 뜻한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지치도록 치열한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장만옥과 양조위의 아름다운 시절이 펼쳐졌달까. 2000년, 그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상영되었던 이 작품을 20년 후인 2020년, '갈라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프로젝트로 부산의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In the mood for LOVE라는 영어 제목처럼, 나에게는 In the mood for BIFF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20대 때 화양연화를 보고 제대로 이해한 부분이 단 한 장면이라도 있었을까.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감정선도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40대가 되었다 해서 자연스럽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나는 마침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불륜'을 다룬 문학 읽기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2019년에는 세계 불륜 고전 명작 전집에라도 실릴 만한 안나 카레니나 3부작, 주홍 글자, 마담 보바리 등, 주옥같은 작품 수천 페이지를 읽어댔고, 2020년에는 단편 불륜으로 눈길을 돌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비롯하여 은희경의 그녀의 세 번째 남자 등을 섭렵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주제의 특징상, 모임 멤버들이 함께 읽는 도서 외에도 적극적인 자기주도 심화학습을 개진하며, 도쿄타워니, 테레즈 라캥이니, 불륜 소설이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열심히 읽고 있던 터였다. 불륜을 행하는 욕망이나 난처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본성, 미묘한 관계들에 주목하며 왜? 그래서? 어쩌려고? 를 묻고 있었다.


화양연화 역시 '불륜'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다가왔지만, 영화의 전당 야외 스크린에 등장한 왕가위 감독은 이 영화를 '비밀'에 대한 이야기로 소개하였다. 서로의 배우자가 부적절한 관계임을 눈치챈 양조위와 장만옥이, 동정적 공감의 편린에서 시작하여 깊고 신중한 애정으로 발전하기까지의 모습이 비밀스럽게 펼쳐졌다. 길고 미끈한 몸매와 화려한 화장, 아름다운 치파오 속에 감춰진 장만옥의 비밀스러운 비애, 신사적이고 사려 깊은 손길이나, 조심스럽고 침착한 목소리 뒤에 감춰진 양조위의 비밀스러운 번뇌. 그들의 사랑은 불륜을 행한 배우자들의 그것보다 정신적이고 숭고했지만, 화양연화라고 불리기엔, 삭이기 어려운 그 아픔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듯 전해졌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택시를 타고 가는 뒷모습, 양조위의 어깨에 기대는 장만옥의 머리는 춘광사설에서 양조위에게 기대는 장국영의 머리를 그대로 연상케 한다. 양조위는 늘, 받아주고 기다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안타까움을 받아주는 것은 앙코르와트의 고대 유적지다. 오래된 나무 구멍에는 양조위가 속삭인 가장 아름다웠던 사랑의 비밀이 봉인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원의 젊은 승려처럼, 나도 부산에서 그 장면을 다시 지켜보았다. 2020 BIFF, 부산국제영화제의 mood 속에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튼, 왕가위 #6-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